1. 고려에 의한 국토의 통일

 

918년 태봉국이 전복되고 고려봉건국가가 성립된 후의 정세는 매우 복잡하였다.

대동강류역이남지역에서는 여전히 심한 혼란상태가 계속되였다.

당시 이 지역은 크게 고려, 후백제, 신라로 갈라져있었다. 이와 함께 한개 혹은 몇개의 고을을 차지하고 《성우두머리》, 《장군》 등으로 자칭하면서 고려나 후백제, 신라로부터 독립하여 할거하는 세력들이 수십개나 각지에 둥지를 틀고있었다. 이자들은 제마음대로 자기 지역의 인민들을 억압착취하였으며 그들을 끊임없이 전쟁에로 내몰아 세력쟁탈전을 벌렸다.

북쪽 발해에서도 개별적봉건세력들이 크게 자라남으로써 사회적혼란이 급격히 커가고있었다. 특히 이틈에서 발해의 통제밑에 있던 말갈족들이 점차 독립적인 세력으로 등장하고 거란은 거란대로 발해에 대한 침략책동을 날로 강화하고있었다.

이러한 정세는 국토통일을 이룩할것을 그 어느 때보다도 절박한 문제로 제기하였다.

국토를 통일하는것은 본래의 민족적념원이기도 하였다.

통일에 대한 인민들의 지향과 요구는 고려성립을 전후한 시기에 더욱 고조되였다. 그것은 태봉국말기에 왕건이 국토를 통일할 인물이라는것을 암시하는 도참설을 만들어 퍼뜨린것만 보아도 잘 알수 있다.

도참설가운데는 풍수에 능한 신라의 감간 팔원이 부소산(송악산)의 생김새를 보고 강충(왕건의 먼 조상)에게 부소산남쪽으로 군을 옮기고 소나무를 많이 심어 산의 바위들을 다 감추면 반드시 여기서 3한을 통합할 인재가 날것이라고 예언하였다는것이다. 또한 918년 왕건의 정변직전에는 왕창근이라는 상인이 어떤 로인에게서 산 신비로운 거울에 희미한 글자 147자가 새겨져있었는데 송악산의 왕건이 진한, 마한을 다 통합하게 될것이라고 암시되여있었다는 말을 돌리였다.

이 이야기들은 왕건파가 인민들의 통일지향에 편승하여 태봉국을 뒤집어엎으려고 하였다는것과 당시 인민들의 높은 통일지향이 막을수 없는 힘으로 자라고있었다는것을 말해준다.

△ 고려봉건국가의 국토통일정책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동족의 나라들을 하나로 통합하려던 고구려의 지향은 10세기초에 창건된 고려에 의하여 계승되였다.》

918년에 성립된 고려봉건국가는 동족의 나라를 하나로 통합하려던 고구려의 지향을 계승하여 신라가 차지하고있던 대동강이남지역의 주민들은 물론 멀리 북쪽에서 이주해 온 발해의 유민들까지도 하나의 주권밑에 통합하였으며 광활한 고구려의 옛땅을 되찾기 위하여 힘찬 투쟁을 벌렸다.

 

 

 

고려의 국토통일 과정도

 

고려는 대동강이남의 후백제, 신라와 함께 그 이북의 옛 고구려땅을 다 통합하여 고구려와 같은 강대한 나라를 일떠세우려는것을 자기의 국토통일정책으로 내세웠다.

고려후기의 충선왕(1309~1313년)이 리제현에게 《우리 태조가 왕자리에 오른 후 남쪽의 신라와 후백제를 통합하기전에 자주 서경과 북쪽 변두리를 순찰하였는데 그뜻이 무엇이였겠는가. 그것은 고구려의 땅을 우리 나라의 옛 강토로 간주하고 그것을 다 차지하려는 의도에서였다. 우리 태조는 원래 신라땅이나 차지하고 압록강까지나 차지하려는것이 아니였다.》라고 말한데서도 알수 있는바와 같이 고려의 통일정책은 고구려의 삼국통일정책을 새로운 력사적조건에 맞게 계승한것이였다.

△ 고려에 의한 국토의 통일과정

고려봉건국가는 새 왕조의 정치적안정을 보장하며 국토통일의 유리한 국면을 조성하기 위한 정책들을 실시하였다.

− 고려봉건국가는 인민들의 환심을 사기 위한 일련의 회유정책을 실시하였다.

고려봉건국가는 농민들을 토지에 얽어매놓기 위한 정책을 실시하였다.

918년 7월 궁예통치시기 조세액이 늘어나 1경(약 1결)의 땅에서 6섬(1섬은 15말)을 수탈하던것을 《옛법대로 10분의 1세로 한다》고 선포하였으며 918년 8월에는 3년동안 조세와 부역을 《면제》해준다고 하였다.

그리고 떠돌아다니던 농민들을 안착시켜 농사를 짓도록 하기 위한 조치도 취하였으며 국가의 직접적수탈대상을 늘일 목적밑에 노비로 전락되였던 일부 량인들의 신분을 《회복》시키기 위한 일련의 대책도 취하였다. 918년 8월 태봉국시기에 노비로 된 량인농민가운데서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 1 000여명을 본래의 신분으로 회복시켜주었으며 왕궁안의 노비들가운데서 일부만 남기고 모두 외거노비로 만들어 왕실소유의 토지에서 농사를 짓게 하였다.

고려초기에 첨예화된 계급적모순을 완화하기 위하여 봉건국가가 실시한 모든 정책들은 본질에 있어서 왕건의 정치경제적지반을 공고히 하며 인민들에 대한 봉건적지배와 수탈을 더욱 강화하기 위한것이였다.

− 고려봉건정부는 지방봉건세력들인 성우두머리들과 장군들을 복종시키기 위한 포섭정책도 실시하였다.

고려봉건국가는 918년 8월에 여러 지방들에 사신들을 보내여 성우두머리들과 장군들에게 새 왕조의 성립을 알리는 동시에 그들이 스스로 귀순하도록 공작을 벌리였다.

고려통치자들은 성우두머리들과 장군들에게 통합의 유리성을 설복하면서 많은 례물을 주거나 물질적대우를 보장해주는 방법으로 그들을 하나하나 복종시켜나갔다. 일부 경우에는 해당지방에 대한 본래의 지배권을 인정해주기도 하였다. 실례로 왕건이 귀순하여 온 벽진군(경상북도 성주군)의 한 《장군》을 그 고을의 장군으로 임명하고 록읍으로 이웃고을의 229호를 더 주는가 하면 쌀 2 200섬과 소금 1 785섬을 례물로 준 사실을 들수 있다.

고려봉건통치배들은 투항해온 성우두머리들과 장군들에게 벼슬등급을 주고 왕가성과 이름을 달아주었으며 왕족과 혼인관계를 맺도록 하여 고려의 집권층에 인입시켰다. 실례로 왕건이 명주(강릉)의 장군 순식에게 대광의 벼슬등급과 함께 왕가성을 주었다는 력사기록을 통해서도 알수 있다.

고려봉건국가는 이러한 여러가지 포섭정책을 통하여 지방의 성우두머리와 장군들을 복종시키는 일을 짧은 기간안에 기본적으로 끝낼수 있었다.

이처럼 고려봉건국가가 각지의 성우두머리들과 장군들을 귀순복종시킴으로써 고려의 국력은 한층더 강화되고 후삼국의 통일을 위한 유리한 조건이 마련되였다.

− 고려는 국토의 통일을 실현하기 위하여 북방진출을 적극화하였다.

○ 고려는 국토통일을 다그치며 북쪽에서 날로 로골화되던 거란과 녀진의 침략과 략탈을 미리 막고 나라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하여 북방 특히 서북지방을 장악하기 위한 사업에 큰 힘을 넣었다.

• 고려의 서북지방에로의 진출은 고구려의 수도였던 서경(평양)을 꾸리는것으로부터 시작되였다.

고려는 성립직후인 918년 9월에 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에 대도호부를 설치하고 황주, 봉주(봉산), 해주, 백주(배천), 염주(연안) 등 여러 고을인민들을 대량적으로 이주시켜 성건설과 방비를 강화하도록 하였으며 평양을 서경으로 승격시키고 수도인 개경 다음가는 정치군사적거점으로 삼았다. 그리고 서경에는 다른 지방과 달리 중앙기관들을 모방한 통치기구들을 두도록 하였으며 국왕(남방의 정세가 매우 복잡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태조 왕건이 거의 해마다 서경을 방문한것.<10차>)도 해마다 일정한 기간 그곳에 나가있군 하였다.

고려봉건국가가 이처럼 서경을 중요시하고 그 건설에 큰 힘을 넣은것은 서경이 고려서북방의 중요한 군사정치적요충지일뿐아니라 동방의 대강국이였던 고조선과 고구려의 수도였다는 전통적지위와 관련되여있었다. 고려는 서경에 의거하여 북방에 대한 방비를 강화하며 특히는 앞으로 그곳에 수도를 옮기고 서경을 거점으로 하여 옛 고구려땅을 모두 포괄하는 강대국을 일떠세울것을 계획하고있었다.

그것은 932년 왕건이 《최근에 서경을 복구하고 백성을 옮기여 그곳을 강화한것은 그 지력에 의거하여 삼한 (주-여기서는 우리 나라 전체를 가리키는 말로 쓰임)을 평정하고 앞으로 거기에 수도를 정하려는것이다.》라고 말한것을 보아도 알수 있다.

• 고려봉건국가는 서경건설과 함께 서북 및 동북지방에로의 진출을 다그쳐나갔다.

919년에는 룡강현, 920년에는 함종(증산), 안북(안주), 921년에는 운남(녕변), 925년에는 성천 등지를 개척하고 이곳에 성을 쌓았다. 이와 함께 920년에 유금필이 지휘하는 3 000명의 군대를 동북지방에 파견하여 녀진인들의 준동을 짓부시고 골암진에 성을 쌓았다.

○ 고려의 북방진출은 고려경내에 들어오는 발해사람들을 포섭하는 사업과 결합되여 진행되였다.

고려가 북방진출을 한창 추진시키고있던 926년에 거란침략자들에 의하여 발해가 무너지고 발해땅은 거란강점자들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였다.

고려는 원래 압록강이남지역을 차지한데 뒤이어 포섭하는 방법으로 발해를 통합할 계획이였다. 이로부터 고려는 923년에 발해왕실과 혼인을 맺고 동맹관계를 유지해왔다.

그러나 발해땅에 거란이 들어간 조건에서 무력으로 거란을 몰아내고 고구려-발해의 옛 땅을 통합할것을 계획하였다. 왕건이 고려를 방문한 서역의 중 멸라에게 《발해는 본래 우리와 친척의 나라인데 그 왕이 거란의 포로가 되였으니 내가 거란을 공격하여 발해땅을 다시 찾아 그의 쌓인 원한을 풀려 한다.》고 한것은 바로 왕건이 발해의 옛 땅을 하나로 통합하려고 한 지향의 표현이였다.

고려는 발해가 종말됨으로써 변화된 정세속에서 고구려-발해의 옛 땅을 되찾기 위한 투쟁을 발해유민들에 대한 포섭을 적극화하는것으로부터 진행하였다. 나라가 무너지자 그 유민들은 동족의 나라인 고려에 수많이 이주해왔다.

 

 

특히 934년에는 발해국의 세자 대광현이 수만명의 사람들을 데리고 고려로 들어왔다. 발해사람들은 그후에도 수백, 수천명씩 집단적으로 혹은 개별적으로 끊임없이 고려로 찾아왔다.

고려로 들어온 발해사람들가운데는 발해왕실과 상층귀족관료, 장군, 중으로부터 일반 평민에 이르는 광범한 계층이 다 포괄되여있었다. 그 가운데는 군대도 많았다.

발해사람들의 고려에로의 이주는 그후 수십년간 계속되였는데 그 수는 무려 수십만명에 달하였다.

고려는 이러한 발해사람들을 적극 포섭하고 그들에게 여러가지 우대정책을 실시하였다.

특히 왕건은 세자 대광현에게 왕계라는 성과 이름을 주고 왕실족보에 등록하였으며 4품의 벼슬등급을 주고 배천을 식읍으로 정하였으며 자기 조상의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발해유민들의 고려에로의 대량적인 이주와 고려의 적극적인 포섭은 민족의 단일성과 외적을 몰아내고 옛 고구려-발해땅을 되찾으려는 공통된 지향에 기초하여 일어난 력사의 필연적현상이였다.

− 고려는 국토의 통일을 실현하기 위하여 신라를 통합하기 위한 사업도 적극 벌렸다.

930년대에 신라는 농민폭동으로 말미암아 그 령토는 분할되고 국력은 극도로 약화되였다.

고려가 통합하여야 할 대상의 하나였던 신라는 성우두머리들과 장군들의 지방할거에다가 오래동안 농민전쟁으로 말미암아 이미 령토는 분할되고 국력은 극도로 쇠퇴하였다.

그러므로 고려는 력량대비의 견지에서는 신라를 크게 문제로 삼지 않았다. 그러나 오랜 력사를 가진 왕조라는 의미에서 신라를 통합하는 사업을 심중하게 처리하지 않을수 없었다.

○ 고려는 신라를 병합하기 위한 정책을 실시하였다.

이 시기 신라에 대한 고려의 통합정책은 신라통치배들로 하여금 고려에 완전히 의존하게 하면서 스스로 투항해오도록 하는것이였다.

• 고려는 920년 신라와 관계를 맺은후부터 930년 1월까지 기간에 신라에 대한 후백제의 침략과 략탈을 여러차례 저지시키고 최대한 《보호》해줌으로써 신라가 고려에 완전히 의거하도록 하였다.

고려와 신라사이의 관계는 920년 신라사신의 고려방문을 계기로 시작되였다. 이해 10월 고려군은 신라의 요청에 따라 대량(합천), 구사(경주부근)지방에 침입한 후백제군에게 타격을 주었고 927년 9월에는 신라수도 경주에 침입한 후백제군을 물리치기 위해 1만명의 군대를 파견하였다. 후백제군이 경주를 략탈하고 철수한 후에는 왕건자신이 직접 정예기병 5 000명을 이끌고 출전하였다.

이 시기 고려군이 후백제와 전개한 격전은 고려의 통일정책을 실현하는 싸움이였을뿐아니라 후백제군의 신라강점을 저지시키고 신라를 고려편으로 끌어당기기 위한 작전이기도 하였다.

• 고려는 930년 1월 이후부터 935년 11월까지의 기간에 신라를 통합하기 위한 직접적인 활동을 벌려 마침내 신라를 통합하였다.

930년 1월 고창군(안동) 병산에서 고려군과 후백제군사이에 큰 싸움이 벌어지게 되였는데 여기에서 고려군은 후백제군 8 000여명을 살상포로하고 크게 승리하였다. 병산전투는 고려의 신라, 후백제통합에서 새로운 국면을 열어놓았다. 고려는 병산전투를 계기로 잃었던 성들을 많이 되찾게 되였을뿐아니라 신라통치배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병산전투직후에 명주(강릉)로부터 흥례부(울산)에 이르는 110여개의 성들이 련달아 고려에 투항해왔다.

이 사건을 계기로 신라는 더이상 국가를 유지할수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되였다. 그리므로 신라왕은 고려왕에게 두차례씩이나 편지와 사신을 보내여 만나볼것을 요청하였으며 이에 따라 931년 2월 왕건이 신라의 수도 경주를 방문하였다. 이때 신라는 고려에 의탁할 의사를 표시하였으며 왕건은 신라봉건통치배들을 회유하기 위하여 931년 8월에는 그들에게 여러가지 물품을 보내였다. 이와 같이 병산전투이후 신라통합을 위한 고려정책에서의 특징은 신라와 직접적인 교섭을 벌린것이다.

그후 후백제와의 대결에서 고려군의 련이은 승리와 935년 6월 투항해온 후백제왕 견훤에 대한 고려의 특별한 우대는 신라왕의 귀순을 촉진시켰다.

935년 10월 드디여 신라왕(경순왕) 김부는 정식으로 귀순할 뜻을 고려에 알리였고 이해 11월에는 귀족관료들과 함께 개경으로 투항하여왔다. 왕건은 경순왕을 잘 포섭하여 그를 정승으로 임명하였으며 자기의 맏딸 락랑공주와 결혼시키고 경주를 식읍으로 떼주었다.

 

 

 

그리하여 신라왕조는 끝장나고 그의 령토는 고려에 통합되였다.

− 국토를 통일하는데서 고려의 주되는 대상으로 된것은 후백제였다.

후백제는 국토 서남부의 넓은 지역을 차지하고있었고 군사력도 비교적 강하였다. 후백제왕 견훤은 먼저 신라를 병합하려고 하였다.

이런 형편에서 고려는 신라를 포섭하면서 후백제에 대하여서는 공세를 취하는 정책을 실시하였다.

○ 고려는 925년 이후부터 후백제에 대한 공세에로 넘어갔다.

고려는 929년 12월 고창군 안동전투에서와 930년 1월 고창군 병산전투에서 후백제군을 크게 격파하였다.

고려는 934년 9월 다시 공세를 취하여 운주에서 견훤의 군대를 크게 격파하였다.

이를 계기로 공주이북 후백제의 30여개 성이 고려에 투항해왔으며 라주의 40여개 군도 고려군대가 장악하였다.

○ 고려는 935년 3월 신검의 정변을 계기로 후백제에 대한 통합을 적극 추진시켜나갔다.

왕자리를 빼앗기고 절간에 갇히웠던 견훤은 그해 6월에 몰래 빠져나와 고려에 투항하였다.

왕자리를 둘러싸고 벌어진 통치배들의 추악한 권력싸움으로 말미암아 후백제안에서는 큰 혼란이 일어나고 통치체계가 마비되였으며 국력은 급속히 약화되였다.

고려는 936년 6월 보병과 기병 1만명을 천안(충청남도)으로 진출시켜 대결전을 준비하였다.

후백제에 대한 최후공격은 이해 9월에 있었다. 모두 8만 7 500명에 달하는 기병과 보병을 3군(좌군, 우군, 중군)으로 편성한 고려군은 천안으로 남하하여 일선군의 일리천(경상북도 선산군)을 사이에 두고 신검의 군대와 대치하여 진을 쳤다. 이 전투에서 근 9 000명에 달하는 후백제군을 살상포로하여 크게 승리하였다.

이 전투를 계기로 걷잡을수 없는 사태에 당황한 신검은 하는수 없이 고려에 투항하였다.

 

 

 

고려는 근 20년간에 걸쳐 후백제, 후기신라의 전지역과 주민, 고구려-발해의 적지 않는 령토와 주민, 그 주권을 하나로 통합하는데 성공하였다.

이리하여 고려는 국토의 통일을 이룩하고 오늘의 우리 나라 판도우에 선 통일국가로 등장하였으며 태조 왕건은 우리 민족사상 첫 통일국가를 세운 왕으로 되였다.

국토의 통일은 하나의 통일국가안에서 살기를 바라는 단일민족으로서의 우리 인민의 강렬한 지향과 그 실현을 위한 인민들의 투쟁에 의하여 이룩될수 있었다.

△ 고려에 의한 국토통일이 우리 민족사발전에서 차지하는 의의

고려에 의한 국토통일이 가지는 력사적의의는 우선 우리 인민이 력사상 처음으로 한나라, 한강토우에서 살게 되였으며 우리 민족의 혈연적 및 문화적인 단일성이 더욱 공고해지게 되였다는데 있다.

또한 민족의 자주권을 고수하기 위한 우리 인민의 투쟁을 성과적으로 벌릴수 있는 유리한 조건을 마련하였으며 민족문화와 경제를 빨리 발전시켜나가는데 유리한 조건을 지어놓았다는데 있다.

그 의의는 또한 우리 인민의 민족적존엄, 우리 나라의 대외적권위를 훨씬 높여주었다는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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