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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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편 조선근대사회
제2장 1884년 부르죠아개혁, 1894년 농민전쟁과 부르죠아개혁
제1절 개화파의 형성과 1882년 군인폭동
1. 개화파의 형성과 초기활동

 

△ 개화파의 형성과 초기활동

19세기 후반기에 우리 나라에서 근로대중의 적극적인 역할에 의하여 상업이 발전하고 화페자본이 축적되여 자본주의적관계가 더욱 발전한것은 사회발전의 합법칙적과정이였다.

ㅡ 자본주의적관계의 확대발전은 낡은 신분제도를 허물면서 새로운 사회계급관계가 이루어지게 하였다.

이러한 시대의 변화에 따라 19세기 50년대에 개화사상을 내놓고 그에 대한 탐구를 심화시켜나가던 개화사상가들은 70년대 초에 이르러 마침내 자기 대렬을 조직적으로 결속하는 단계에로 넘어갔다.

이 시기에 김옥균은 정계에서 활동하면서 개화를 지향하는 새로운 정치세력을 꾸리기 위한 비밀활동을 꾸준히 벌렸다.

 

 

김옥균

 

그의 이러한 활동을 적극 도와준 사람은 류홍기, 박규수였다.

김옥균은 이들의 적극적인 방조로 후에 부르죠아개혁의 중요한 지도성원으로 된 홍영식, 박영교, 리동인 등과 손을 잡게 되였으며 그들과 함께 개화운동을 활발히 벌렸다.

한편 김옥균은 독자적으로 모든 기회를 리용하여 새 사상을 선전하고 지지자들을 모았다.

김옥균의 노력에 의하여 류상오를 비롯한 유생출신들이 개화사상가들의 영향밑에 들어섰다.

궁녀, 내시들가운데서도 나라의 근대화를 지향하여 김옥균의 영향밑에 들어선 성원들이 적지 않다.

1874년경부터 김옥균에게 비밀정보를 제공해준 궁녀 고씨는 김옥균이 과거에 급제한 후에 관청에 드나들면서 영향을 준 사람이였다.

김옥균을 비롯한 개화사상가들은 군인들을 인입하는데 각별한 노력을 기울여 장교출신의 신중모, 백락운, 하사관출신의 리인종, 김기준 등 적지 않은 하층군관들과 병사들을 장악하였다.

김옥균은 자본가, 상인 등 여러 계층들속에서도 자기의 세력을 넓힘으로써 남홍철과 박상인 같은 상업자본가들을 인입하였다.

그밖에 화계사의 중 차홍식을 비롯하여 최하층신분의 적지 않은 《천민》들이 개화사상을 지지하여 김옥균의 영향권에 들어섰다.

이와 같이 개화사상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늘어남에 따라 김옥균의 사상적영향밑에 뭉친 사람들은 하나의 정치세력으로 형성되였으며 이때로부터 그들은 개화파라고 불리우게 되였다.

그리고 보수적이며 반동적인 봉건통치배들은 수구파라고 불렀다.

ㅡ 개화파는 1870년대 초에 형성되였다.

그것은 김옥균이 1884년에 쓴 《갑신일록》의 다음과 같은 기록을 통하여 알수 있다.

《궁녀 고씨는 년령이 42살, 평시에 고아주머니라는 별호로 불리웠고 곤전(명성황후)일가의 근시로 뽑혀있는분인데 벌써 10년전부터 우리 당에 비밀을 통보해주는 사람이다.…》

이 기록은 갑신정변이 일어나기 10년전인 1874년에 이미 개화파가 형성되여있었다는것을 명백히 말하여준다.

정치세력으로 형성된 개화파는 자기 발전의 일정한 단계에서 비밀결사형식의 조직을 가지였는데 그것이 바로 《충의계》였다.

《충의계》는 부르죠아민족운동을 준비하기 위한 정치적비밀결사였고 개화파세력의 핵심조직이였으며 우리 나라에서의 근대적정치조직의 맹아였다.

김옥균을 비롯한 개화파지도성원들은 핵심들을 《충의계》에 묶어세우는 한편 중앙정부에서 벼슬자리에 오른 청년관리들에게 사상적영향을 주기에 힘썼다.

그리하여 김홍집, 어윤중, 김윤식 등 봉건정부안에서 중요한 관직을 차지하고있던 혁신관료들이 개화파의 지지자, 동정자로 확고히 돌아서게 되였다.

이와 같이 개화파는 1870년대 전반기에 우리 나라의 새로운 정치세력으로서 확고한 자기의 지반을 꾸리기 시작하였다.

ㅡ 개화파는 개화사상의 기본요구에 따라 나라의 독립을 고수하며 사회적진보를 실현하기 위하여 부닥친 난관을 이겨내면서 부르죠아민족운동의 과업을 해결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해나갔다.

첫시기 개화파들의 활동에서 중심적인 내용을 이룬것은 한편으로는 날로 강화되고있던 자본주의침략으로부터 국내시장을 보호하며 나라의 반식민지화의 위기를 막는것이며 다른편으로는 부르죠아개혁사업에 지체없이 착수하는것이였다.

◦ 개화파는 국내시장을 보호하기 위하여 우선 자본주의국가와 통상할수 있는 자체의 준비를 앞세우는 기초우에서 개항을 하며 통상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인정하고 적극적인 활동을 벌렸다.

개화파는 1881년 4월에 홍영식, 어윤중 등 수십명으로 구성된 큰 시찰단을 일본에 파견하였고 김옥균자신도 그해 말에 직접 일본에 건너가 일본시찰을 진행하는 한편 차관, 무기구입 및 그밖의 긴박한 당면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또한 1881년 7월에 개화파의 적극적인 활동에 의하여 통리기무아문에서는 김윤식을 령선사로 하는 수십명의 류학생, 실습생들을 청국에 파견하였다.

개화파는 국내시장을 보호하기 위하여 또한 일본침략자들에게 무관세를 규정한 강도적인 《조일통상장정》을 갱신하기 위하여 활동하였다.

◦ 개화파는 자본주의침략으로부터 국내시장을 보호하기 위한 투쟁을 벌려나가는것과 함께 개혁사업에 지체없이 착수하였다.

개혁사업에서 선행공정으로 제기된것은 사회에 개화사상을 널리 보급하여 개화파들을 계몽시키고 그 대렬을 확대하여 개화사상의 영향력을 강화하는것이였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모든 혁명운동은 의식적인 운동입니다. 혁명운동은 사람들을 선진사상으로 각성시키는것으로부터 시작되고 선진사상으로 무장한 인민대중의 힘에 의하여 승리하게 됩니다.》

사람들의 사상의식은 혁명운동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혁명운동을 사람들의 사상의식을 계발시키는것으로부터 시작하는것은 혁명운동발전의 필연적요구로 나선다.

개화파들은 봉건사상에 비한 자본주의의 진보성을 연구하는 사업과 함께 저술활동을 통하여 개화사상을 보급하는 사업으로부터 부르죠아개혁사업을 시작하였다.

개화파들과 그 지지자들이 쓴 대표적인 책들로는 김옥균의 《기화근사》, 박영교의 《지구도경》, 어윤중의 《중동기》 등을 들수 있다. 

개화파들의 적극적인 활동에 의하여 각계층 사람들속에서는 개화사상을 지지하고 동경하는 대렬이 늘어나게 되였으며 개화파세력은 국가정치에 영향을 미칠수 있을 정도로 자라나게 되였다.

개화파들은 이와같이 자기의 세력이 일정하게 자라나자 본격적인 정치투쟁에 나섰다.

그들은 우선 혁신관료들을 추동하여 봉건적정치기구를 근대화하기 위한 활동을 적극 벌려나갔다.

개화파의 노력에 의하여 1880년 12월 새로운 행정기관인 《통리기무아문》이 창설되였다.

개화파들은 군사기구개편도 진행하였는데 1881년 4월에 《별기군》이라는 신식군대를 조직하여 근대적인 훈련을 시작하였고 그해 12월에는 5영을 페지하고 무위, 장어 두영을 설치하였다.

개화파들이 착수한 개혁사업은 처음부터 안팎의 반동세력의 파괴음모책동을 반대하는 치렬한 투쟁속에서 진행되였다.

그러나 내외반동들의 그 어떤 방해책동도 개화파들의 적극적인 활동을 가로막지 못하였다.

△ 개화파에 의한 부르죠아개혁의 추진

1882년 군인폭동후 개화파들은 부르죠아개혁을 전면적으로 추진시키기 위한 활동을 적극 벌렸다.

이 시기 개화파의 활동이 더욱 적극화되게 된것은 군인폭동후 봉건통치체제가 더욱 반동화되여간것과 관련되였다.

군인폭동이 진압된후 되살아난 명성황후일당의 반동정권은 더욱 오만하게 책동하면서 인민들에 대한 봉건적착취를 전례없이 강화하였으며 인민들의 반봉건반침략적진출을 가혹하게 탄압하였다.

이 시기 개화파의 활동이 더욱 적극화되게 된것은 또한 개화풍조가 하나의 사회적흐름으로 되여 정계에서까지 개혁의 필요성을 운운하는 목소리가 울려나오게 된것과 관련되였다.

김옥균을 비롯한 개화파들은 군인폭동후 조성된 이러한 주객관적조건과 가능성을 정확히 타산한데 기초하여 부르죠아개혁을 추진시키기 위한 활동을 적극 벌렸다.

ㅡ 개화파들은 국가정치기구를 개혁하는데 선차적주목을 돌렸다.

개화파들의 주동적역할에 의하여 1882년 7월 25일 정부안에 새로운 기구로서 기무처가 조직되였다.

기무처는 정치, 경제,군사 등 모든 부문에서 정책적으로 제기되는 중요한 문제들을 집체적으로 토의결정하는 협의제기관인 동시에 실제상의 최고권력기관이였다.

기무처가 조직됨으로써 나라의 크고작은 모든 문제를 국왕이 독단하던 전제왕권이 어느 정도 제한을 받게 되였다.

1882년 10월 20일에는 국가의 지나친 재정지출을 줄이고 비대해진 국가통치기구를 축소할것을 목적으로 감생청이 설치되였다.

또한 1882년 12월 통리군국사무아문(통리내무아문)을 설치하여 국내의 모든 정치, 군사, 행정기관들을 통일적으로 장악지도하도록 하였다.

ㅡ 개화파들은 근대적국가의 무력적기초로 될 신식군대를 양성하는데 큰 힘을 기울였다.

김옥균은 개화파의 영향밑에 있는 청년들을 외국사관학교에 파견하여 근대적인 군사학을 배우게 하는 한편 1883년 봄에 광주에 특별군영을 설치하고 약 1 000명의 신식군대를 편성하였다.

1883년 말에 진행된 500명의 신식군대열병식은 개화파가 조직한 군대가 종전의 군대에 비해 잘 훈련된 전투력있는 무력으로 자라고있음을 보여주었다.

ㅡ 개화파들은 새 인재양성사업과 함께 개혁사업의 사회정치적지반을 확대하기 위한 정치문화계몽사업을 벌려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두었다.

김옥균은 전망성있는 우수한 청년들을 외국에 류학보내여 그들을 장차 부르죠아개혁사업을 떠메고나갈 개명한 인재로 준비하도록 하였다.

또한 1883년 8월 정부직속의 근대적출판기관으로서 박문국을 설치하고 이에 기초하여 그해 10월 1일부터 우리 나라에서 첫 근대적신문인 《한성순보》를 발행하기 시작하였다.

개화파들은 이와함께 경찰제도를 개혁하고 근대적우편제도 및 기업체들을 창설하기 위한 활동을 벌렸다.

그리하여 서울에 순경국이 설치되여 중세기적인 경찰제도가 일부 근대적인것으로 개편되였으며 1884년 3월에는 중세기적인 역마법이 페지되고 근대적인 체신기관으로서 우정국이 창설되였다.

개화파는 전면적으로 추진되는 부르죠아개혁사업에 요구되는 방대한 자금문제를 풀기 위하여 적극 활동하였다.

김옥균은 처음 국내에서 개혁자금을 해결하려고 노력하였지만 수구파반동들의 방해책동과 국고의 고갈, 상업자본가들의 정치경제적취약성 등으로 필요한 자금을 원만히 해결할수 없었다.

이러한 조건에서 그들은 외국에서 차관을 얻어보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신중한 문제였다.

왜냐하면 자본주의침략자들이 서로 앞을 다투어 우리 나라에 대한 침략을 노리고있던 형편에서 잘못하면 그것이 식민지적예속을 더욱 심화시킬 위험성이 있었기때문이였다.

당시 김옥균은 일본침략자들을 잘 리용한다면 차관을 얻을수 있으리라고 타산하였다.

그때 일본침략자들은 그들대로 개화파들에게 《원조》를 주어 개화파들로 하여금 청국세력을 반대하게 함으로써 저들의 조선침략에 유리한 조건을 마련하려고 흉책하였다.

이러한 립장을 간파한 김옥균은 2차 일본방문때 요꼬하마정금은행과 17만원의 차관계약을 맺었으며 일본외무경 이노우에로부터 300만원의 차관을 받을데 대한 약속을 받아냈다.

- 개화파들은 이러한 사업을 밀고나가면서 국왕을 자기편에 전취하는데 큰 관심을 두었다.

그리하여 우유부단한 국왕을 점차 개화파의 편으로 기울어지게 하였다.

개화파들이 추진시킨 부르죠아개혁사업들은 단순히 봉건제도를 자본주의제도로 교체하려는데 머무른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서 산업혁명을 수행할것을 예견한것으로서 근대부르죠아민족운동에서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가진 진보적인 시도였다.

그러나 개화파들이 진행한 부르죠아개혁사업은 처음부터 련합된 국내외반동세력의 완고한 반항에 부딪치게 되였다.

부르죠아개혁을 파탄시키기 위한 내외반동들의 책동은 1884년 봄 이후 극단에 이르렀고 수구파반동들은 개화파의 주동인물인 김옥균을 살해함으로써 개혁운동을 교살하려는 악랄한 시도를 하는데까지 이르렀다.

이러한 조건에서 평화적방법으로 부르죠아개혁을 수행하는것은 거의 불가능하였으며 이로부터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나게 되였던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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