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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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편 조선봉건사회
제2장 발해와 후기신라
제4절 후백제, 태봉국의 출현, 발해국의 종말과 국가회복을 위한 투쟁
1. 후백제, 태봉국의 출현과 신라국토의 분렬

 

9세기 말 농민전쟁에 뒤이어 후기신라는 10세기 초에 여러 봉건국가로 분렬되였다.

그것은 착취계급출신의 일부 농민군지휘자들이 농민군의 성과를 가로채여 봉건국가를 세웠기때문이였다.

 

 

△ 후백제의 출현(後百濟)

― 후백제는 견훤(甄萱)이 900년에 새로 세운 봉건국가

견훤은 본래 상주에 고향을 둔 토호출신인데 한때 서남해안 방어군의 무관으로도 복무하였다.

견훤은 9세기 신라의 가혹한 봉건적착취와 억압을 반대하는 농민들의 대규모적인 폭동이 전국을 휩쓸고있을 때 새 봉건왕조를 세우려는 야욕을 품고 농민폭동군의 지휘자로 나섰다.

892년 그가 지휘한 농민군이 왕경서남쪽의 고을들에 진격하자 이르는곳마다에서 투쟁에 일떠서고있던 농민들이 이에 합류하였다. 그리하여 한달도 못되는 사이에 5 000명의 대부대로 자라났다. 이렇게 되자 그는 무진주(전라남도 광주)를 점령하고 그곳을 거점으로 새 왕조를 세울 지반을 닦아나갔다.

견훤이 이처럼 순조롭게 목적을 이룰수 있은것은 《백제부흥》이라는 선전으로 백제지역이였던 그 지방 인민들의 반신라감정을 리용한데 있었다.

그후 그는 충청도남부의 일부와 전라도일대를 장악한 다음 완산주(전주)를 수도로 정하고 《후백제》국가의 성립을 선포하였다. 왕위를 차지한 견훤을 비롯한 후백제의 통치배들은 인민들에게 신라는 온갖 학정을 다하였지만 후백제국은 《어진정치》를 실시할것이라고 선전하였다. 그러나 모든 정책은 종래 봉건국가들과 조금도 다른것이 없었다.

후백제통치배들은 조세, 공물, 부역, 병역 등을 통하여 인민들을 가혹하게 착취하고 수탈하였으며 령토확장에 미쳐 인민들을 끊임없이 전쟁에로 내몰았다. 후백제군은 901년에 신라의 대야성을, 907년에는 일선군이남의 10개 성을 점령하였다.

그리하여 짧은 기간에 오늘의 경상북도 일부 지역에까지 세력을 뻗치게 되였다.

후백제는 한편 대외적으로 멀리 거란, 오월국과 관계를 가지면서 자기의 지위를 강화하려고 하였다.

△ 태봉국의 출현(泰封國)

― 태봉국은 궁예가 901년에 세운 봉건국가

후백제의 출현과 때를 같이 하여 901년에 궁예가 또 하나의 봉건국가를 세웠다.

궁예는 원래 신라왕족(아버지 48대 경문왕<응렴>, 어머니 설씨-후궁)의 출신이였으나 왕궁에서 밀려나 선종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중노릇을 하였다. 그는 왕이 될 야심을 품고 절간들을 돌아다니며 권력장악의 기회를 노리다가 량길의 농민군에 끼여들어 지휘자로 나섰다.

궁예는 894년 명주(강릉)를 점령하고 농민군이 3 500명으로 늘어나자 점차 자기의 본심을 드러내놓기 시작하였다.

우선 그는 량길의 북원농민군부대에서 떨어져나와 독자적으로 부대를 편성하고 각지에 할거하고있던 봉건세력들과 결탁하여 새로운 봉건통치기구들을 꾸리기 시작하였다. 특히 9세기 말에 개경, 연백 등지에서 수십년간 할거하고있던 대봉건세력인 왕건(후의 고려태조)을 포섭함으로써 세력을 확장하였다.

량길은 궁예가 봉건군주로 변신함을 알자 그를 반대하여나섰다.

량길의 농민군은 북원을 본거지로 하여 30여개 성을 차지하고있었다. 량길은 899년 자기의 무력을 총동원하여 비뇌성(경기도 양주근처)으로 진출시켜 궁예를 공격하였으나 궁예의 반격으로 큰 손실을 입게 되였다.

결국 궁예는 중부조선의 넓은 지역을 차지하고 마련된 지반에 의거하여 901년에 나라를 세우고 왕이 되였다.

궁예가 새로 선포한 나라의 국호는 《고구려》,《고려》, 《후고구려》 등으로 불렀다. 그후 904년에는 국호를 《마진》이라고 고치고 《무태》라는 년호를 제정하였으며 911년에는 국호를 《태봉》으로, 년호는《수덕만세》로 정하기도 하였다.

태봉국의 령역은 경기도, 강원도, 황해도일대였으며 그 중심지는 초기에는 송악에 정하였다가 그후 철원으로 옮기였다.

궁예는 옛날에 신라가 당나라를 끌어들여 고구려를 무너뜨린 복수를 하겠다고 하면서 앞으로 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을 복구하고 그에 의거하여 고구려와 같은 대국을 일떠세우겠다고 하였다.

이것은 사대주의에 물젖어있던 신라왕조에 대한 인민들의 반항심과 강대하였던 고구려에 대한 이 지역 인민들의 추억, 그런 나라를 세울데 대한 지향을 자기의 정권강화에 리용하려는것이였다.

― 마진(태봉국)의 정책실시

태봉국의 통치배들 역시 봉건적지배와 수탈을 강화하고 인민들을 억압착취하기 위한 통치기구를 꾸리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과거에는 인민을 억압하는 소수통치배들이 인민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우로부터 강제로 정권을 만들었기때문에 그것은 항상 반인민적이며 관료적인 정권이였습니다.》

봉건정부의 최고합의기관인 광평성(廣評省)과 그밖에 병부, 의형대, 조위부를 비롯한 수십개의 관청들을 설치하였다.

태봉국통치배들은 904~905년에 수만명의 인민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철원(강원도)에 방대한 규모의 40리도성을 쌓고 그안에 호화로운 궁전과 관청, 불교사원들을 건설한후 수도를 송악에서 철원으로 옮기였으며 청주관내의 주민 1 000여호를 이주시켰다.

태봉국의 통치배들은 한편 끊임없는 국내전쟁을 벌려 령역을 넓혀나갔다.

903년 3월 왕건이 거느린 태봉국의 수군은 바다길로 멀리 후백제의 무주(무진주일대)를 공격하여 10여개고을을 점령한 다음 그 일대의 이름을 라주로 고치고 군대를 주둔시켰다. 905년에는 신라에 대한 공격전을 벌려 죽령동북지방을 장악하는 한편 서북방의 대동강이북지역에 진출하여 패서 13진을 설치하고 방위시설을 꾸리였다.

태봉국의 통치배들은 인민들에 대한 억압과 착취를 더욱 강화하였다.

특히 궁예는 자기를 미륵불로 선포하고 그렇기때문에 자기는 화려한 궁전에서 호화로운 생할을 하여야 하며 모든 사람들은 자기에게 순종하여야 한다고 설교하면서 인민들에 대한 억압과 착취를 합리화하려고 하였다.

또한 궁예는 후기신라를 《멸도》(망한 수도)라고 부르면서 투항해오는 신라주민들을 모조리 학살하였고 자기를 반대하는 인민들과 대신뿐아니라 자기의 처, 자식들까지도 마구 죽이였다.

폭군은 결코 오래가지 못하였다.

궁예의 이러한 극악한 폭정과 횡포는 인민들의 큰 분노와 반항심을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정세를 리용하여 918년 6월 왕건과 그 일파인 흥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등은 1만의 군대를 동원하여 정변을 일으켰다. 이 정변에 의하여 궁예는 밀려나고 새로 왕건이 왕자리에 올라앉게 되였다.

새 왕조는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의미에서 나라이름을 《고려》(高麗)라고 하고 년호를 《천수》(天授)라고 고치였다. 그리고 수도를 개경(개성)으로 정하였다.

새로 선 고려봉건국가 역시 소수 봉건지주계급이 권력을 잡고 그들의 리익을 옹호하며 인민들을 억압착취하던 반인민적봉건국가였다. 그러나 고구려사람들의 후손들이 주동이 되여 고구려를 계승한 고려가 성립된것은 우리 나라 민족사에서 중요한 사변의 하나로 되였다.

이처럼 10세기 초에 후백제, 후고구려(태봉국)가 성립됨으로써 후기신라는 크게 후백제, 후고구려, 후기신라 3개로 갈라지게 되였다.

10세기 초에 대동강이남지역에는 이 세나라밖에도 크고작은 할거세력들이 많았는데 그들은 《성우두머리》(城主), 《장군》(將軍), 《군왕》(郡王)으로 자칭하였다.

그리하여  고려가 선 다음에도 고려, 신라, 후백제와 발해가 한동안 병존해있게 되였다.

후기신라인민들은 9세기 말에 대규모적인 농민전쟁을 벌려 우리 나라 력사를 전진시키는데 기여하였으나 결국 봉건국왕으로 변질된 일부 농민군지휘자들에게 투쟁의 열매를 빼앗기고 인민들은 여전히 봉건통치의 쇠사슬에 얽매여 신음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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