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9세기말 농민전쟁

 

봉건적억압과 착취를 반대하는 인민들의 반항심은 9세기경에 들어서면서 대규모적인 투쟁으로 타번지기 시작하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착취와 압박이 있는곳에서는 반드시 인민들의 혁명투쟁이 일어나는 법이며 압제자들의 폭압이 강화될수록 그에 항거하는 인민들의 투쟁은 더욱 조직화되고 완강하여지는 법입니다.》

― 9세기 초중엽의 투쟁

815년 8월에 신라의 서부지대에서 비교적 큰 규모의 폭동을 일으켰고 819년에는 전국의 여러곳에서 《초적》이라고 불리운 농민군이 투쟁을 벌렸다. 그리고 825년에는 수신의 지휘밑에 농민군이 북한산주를 공격하였다.

이 무렵부터 각지에서 농민군들이 100여명안팎의 집단을 뭇고 산에 의거하여 기습전을 전개하였다.

9세기 전반기 이러한 투쟁들은 아직 산발적이고 규모도 작았으나 봉건통치배들에게 큰 타격을 주었으며 이 투쟁속에서 다음 단계의 보다 큰 규모의 투쟁이 차츰 성숙되여가고있었다.

― 9세기 말 농민전쟁

 

 

9세기 말 농민전쟁도

 

9세기 말에 이르러 인민들의 투쟁은 대규모적인 전쟁으로 발전하였다.

그것은 889년 국가의 창고가 텅비게 되자 곤경에 빠진 진성녀왕이 온 나라 각지에 관리들을 파견하여 강제로 조세를 빼앗아들이는 한편 이를 반대하는 인민들을 가혹하게 탄압하였기때문이였다. 이리하여 인민들은 마침내 투쟁에 일떠섰으며 곧 농민전쟁으로 번지게 되였다.

농민전쟁의 첫 봉화를 추켜든것은 사벌주(상주)농민들이였다.

889년 농민들은 원종과 애노의 지휘밑에 사벌주를 들이쳐 장악한 다음에 악질관료들을 처단하였다.

봉건정부는 령기를 우두머리로 하는 《토벌군》을 내몰았으나 농민군에 접근하지 못하고 주변을 맴돌기만 하였다. 당황한 봉건정부는 악질관리인 령기의 목을 떼고 그 대신 촌주 우련을 우두머리로 올려앉혔다. 그러나 《토벌군》은 참패만을 당하였고 우련마저 농민군에 의해 처단되였다.

사벌주농민들의 투쟁에 뒤이어 전국각지에서 투쟁의 불길이 세차게 타번지였다.

890년대에 신라전국에서는 거의 20개에 달하는 큰 농민군부대들이 활동하고있었다.

• 북부지방의 량길, 궁예가 지휘한 농민군부대들의 활동이 매우 활발하였다.

량길이 지휘한 부대는 북원(원주)을 중심으로 맹활동을 하였는데 북원농민군부대가운데서 가장 강한 부대는 궁예가 지휘한 부대였다. 이 부대는 처음 동쪽 명주일대로 공격하여 마침내 894년에 명주점령에 성공하였다.

이것은 9주의 하나로서 9개군 25개현을 포괄하는 큰 행정단위인 명주전지역에 대한 장악을 의미하였다.

농민군이 명주를 점령함으로써 신라봉건국가의 통치권이 강원도북부일대에 미칠수 없게 되였으며 농민군의 그후 투쟁에 유리한 국면을 열어놓고 북쪽으로 진격하는데 유리한 정세를 조성하였다.

이 투쟁속에서 농민군대오도 점차 자라났다.

894년 명주점령당시 농민군대오는 3 500명에 달하였다. 이때 궁예는 부대를 14개의 대오로 재편성하고 매개 부대에 사상(부대장)을 두었다. 이때부터 궁예는 이 14개 부대를 통솔하는 《장군》으로 되였으며 량길의 북원농민군부대들에서 떨어져나왔다. 궁예의 농민군은 명주점령후 방향을 바꾸어 북쪽으로 진격하였다. 이리하여 저족(린제), 생천(화천), 부평(김화), 철원 등을 점령하였으며 자기 세력을 패서일대에까지 뻗치였다.

궁예는 이 지방들에서 옛 고구려를 회복하겠다는 구호를 내세웠다.

그것은 궁예가 이 지방이 옛 고구려땅이고 고구려의 후손들이 늘 신라통치배들을 저주하면서 고구려와 같은 강력한 나라를 지향하고있는 점을 리용한것이였다.

• 한편 신라의 서부지방의 농민군부대들가운데는 견훤이 지휘한 부대가 맹활약을 하고있었다.

892년 서남부일대에서 일어난 이 부대는 무진주(광주) 동남쪽의 군, 현들을 습격하여 장악하였다. 농민군대오는 불과 한달동안에 5 000명에 이르게 되였다. 농민군은 이에 토대하여 무진주(광주), 완산주(전주)를 점령하였고 그후 공주이남 충청도일대, 전라도, 경상남도 서부지역의 군, 현을 차지하였다.

견훤이 지휘한 부대가 이러한 성과를 거두게 된것은 견훤이 백제국가를 세운다는 반신라적구호를 들었기때문이였다.

• 896년 후기신라의 서남부지역에서는 《붉은바지농민군》(赤袴賊)이 활동하였다.

농민군은 단결의 표시로 붉은바지를 입었는데 896년경부터 시작하여 지리산부근, 섬진강, 락동강, 경주로 진격하여 경주서남부 모량리까지 진출하였다.

 

 

붉은바지농민군의 투쟁

 

《붉은바지농민군》은 자체의 약점과 정부군의 반격으로 후기신라왕조를 뒤짚어엎을 자기의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으나 봉건통치배들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

• 이 시기 대동강이북지역의 후기신라밖에서 고구려유민들이 신라 각지 농민들의 투쟁에 합세하였다.

평양일대를 거점으로 하여 검용이 지휘하는 농민군과 중성(증산)일대에서 명귀가 지휘하는 《붉은 옷》부대, 《누런 옷》부대 등의 활동은 후기신라인민들의 투쟁을 고무하고 통치배들에게 커다란 타격을 주었다.

ㅡ 력사적의의와 실패원인

• 력사적의의;

ㆍ 봉건통치배들에게 돌이킬수 없는 타격을 주고 신라봉건국가를 멸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다.

ㆍ 지난날 우리 인민의 계급투쟁사에서 처음으로 되는 대규모적인 투쟁이였다.

• 실패원인;

ㆍ농민군이 아직 사상적으로 각성되지 못한데 있었다.

농민군은 계급적리해관계를 아직 깊이 자각하지 못하였다. 그들은 불행과 고통의 화근이 봉건제도자체에 있다는것을 깊이 깨닫지 못하였고 적지 않게 《어진왕》, 《어진관리》가 나오면 자기들의 처지가 개선될것이라는 환상을 가지고있었다.

ㆍ각지 농민군들이 서로 단합하여 싸우지 못한데 있다.

중세농민들의 투쟁이 근본적인 약점에서 벗어날수 없었던것은 옳은 지도를 받을수 없었던 사정과 중요하게 관련된다. 결국 농민군들은 자기들이 거둔 투쟁의 열매를 새로 등장한 봉건세력들에게 빼앗기지 않으면 안되였다.

• 교훈;

ㆍ사상적으로 각성되지 못하면 자기의 힘을 제대로 발휘할수 없다는것이다.

ㆍ조직적으로 단합하여 투쟁을 벌려야 최후승리를 이룩할수 있다는것이다.

이러한 실패원인과 교훈은 중세농민들의 투쟁전반에서 찾아볼수 있다.

이처럼 9세기 말에 인민들은 봉건적인 억압과 착취를 반대하는 투쟁을 거세차게 벌려 봉건통치배들에게 커다란 타격을 주고 신라봉건국가를 궁지에 몰아넣었다.

 

복습문제

-9세기 말 농민전쟁전에 일어난 대표적인 반란사건에 대하여 

-9세기 말 농민전쟁시기 활동한 대표적인 무장부대들에는 어떤것들이 있는가. 

-9세기 말 농민전쟁이 실패한 원인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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