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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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편 조선봉건사회
제1장 첫 봉건국가들의 성립과 발전
제5절 세나라시기의 문화
3. 문학과 예술

 

문학예술은 시대의 반영이다.

그러므로 당대의 생활을 폭넓고 깊이있게 반영한 작품이라야 걸작이라고 할수 있으며 그러한 작품이 결국 후세에 남는다.

△ 문학

삼국시기 문학은 그 이전 고대시기보다 훨씬 발전하였다. 문학에서 주제령역이 다양하고 작품의 계급적성격, 애국적경향이 더욱 뚜렷해졌으며 형상수준이 높아지고 형식이 다양해졌다.

세나라시기 문학에서는 설화문학, 소설문학, 시가문학이 크게 발전하였다.

― 설화문학

세나라시기 인민들의 의식수준, 예술창조능력이 높아짐에 따라 설화작품들이 많이 창작되였다. 이 과정에 설화문학이 고대시기보다 훨씬 발전하였는데 신화창조의 단계를 벗어나 여러갈래로 나뉘여지면서 내용상에서는 력사설화, 생활세태설화, 형식상에서는 전설, 민화, 우화 등이 발전하였다.

세나라시기 력사설화로서는 건국과 관련된 내용을 반영한 설화인 《주몽전설》(고구려건국전설), 《온조전설》(백제), 《박혁거세전설》(신라), 《수로왕전설》(가야)과 반침략투쟁을 반영한 설화인 《을지문덕이야기》, 《록족부인이야기》(고구려) 등을 들수 있다.

세나라시기 생활세태설화는 인민들의 일상생활을 소재로 한 설화로서 고구려의 《고기를 기르는 처녀》, 백제의 《서동이야기》, 우리 선조들의 일본렬도진출과 관련된 신라의 《연오랑과 세오녀》, 《방이와 그의 동생》, 《견우와 직녀》등을 들수 있는데 이러한 설화들은 인민들의 처지와 풍속, 정신도덕적풍모를 잘 보여주고있다.

― 소설문학

우리 나라에서 A.D. 1세기에 창작된 고전소설은 《호동과 락랑공주》를 들수 있다. 이 소설을 통하여 고구려초기에 소설이 발생하였다는것을 알수 있다.

고구려에서 발생한 소설은 그후 백제, 신라로 퍼지면서 점차 발전하였다.

초기발전단계의 작품들로서 《온달전》, 《토끼와 거부기》(고구려), 《도미전》(백제), 《설씨의 딸》, 《박제상전》(신라)을 들수 있는데 이 소설들은 그 발생초기 소설로서의 발전면모를 잘 보여준다.

초기소설로서의 발전면모는 《온달전》을 통하여 잘 알수 있다. 

소설에서는 등장인물들의 인간관계와 사건을 생활적으로 흥미있게 보여주고있다.

소설의 이야기줄거리는 주선과 부선으로 구성되여있는데 주선에서는 주인공 온달이 무예를 닦아 명장으로 자라서 외적을 반대하여 희생적으로 싸운 이야기이고 부선에서는 평강공주가 남편을 돕는 이야기(사랑선)이다.

이 소설은 《미천》한 온달의 형상을 통하여 고구려인민들속에서 높이 발양되던 상무적기풍과 애국정신뿐아니라 당시 피착취, 피압박인민들의 생활과 그들의 애국심을 구현한것으로 하여 조선문학사상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도미전》은 인민들의 아름다운 정신도덕적풍모를 백제 개루왕의 추악성과 대조적으로 보여준 작품이다.

작품은 고구려인민들이 도미와 그의 안해를 불쌍히 여겨 옷과 먹을것을 모아주었다는 이야기를 통하여 먼 옛날부터 우리 인민들은 한 강토에서 서로 도우며 화목하게 살아왔다는것을 보여주고있다.

소설 《설씨의 딸》에서 설로인과 그의 딸 그리고 가실의 형상은 예로부터 화목하게 살아온 우리 인민들의 생활모습을 생동하게 펼쳐보이고있다.

《설씨의 딸》에는 늙고 병든 로인에게 국경수비를 강요하는 봉건통치배들의 반인륜적처사에 걱정이나 하고 또 대신 맡아나서는것으로 감수하는 식의 계급적제한성은 있으나 어려운속에서도 아름답고 순결한 마음씨를 고이 간직하고 살아가는 근로인민들의 정신, 도덕적풍모를 잘 보여주고있다.

― 시가문학

• 가요의 창작

이 시기 가요들에서는 착취계급에 대한 증오와 반항정신, 봉건적질곡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인민들의 지향과 념원이 강하게 노래되고있으며 외래침략자들을 물리치고 민족의 자주성을 지켜나가는 인민들의 애국적감정이 잘 반영되여있다. .

또한 인민들의 창조적로동활동도 생동하게 그려지고 주제사상적내용도 더욱 다양해졌다.

고구려의 가요로서는 《래원성》, 《명주》, 《연양》, 《동동》 등이 있다.

가요  《연양》은 압제자의 비인간성을 폭로하고 사람들의 의로운 행동을 노래하고있으며 《래원성》은 고구려의 강대성을 반영하고있다.

백제의 가요로서 《정읍사》, 《지리산》, 《무등산》, 《방등산》 등이 있다.

《정읍사》는 현존하는 세나라시기의 가요작품들중 대표적인것의 하나이다. 이 가요는 정읍지방의 한 녀인이 장사하려 가서 오래동안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걱정하여 그가 무사히 돌아오기를 바라며 부른 노래이다. 가요에는 남편에 대한 안해의 소박한 사랑의 감정을 우리 말의 우수성을 살려 아름다운 운률로 잘 형상하였다.

신라에서도 《회소곡》, 《도솔가》 등과 같은 로동가요, 《해론가》, 《양산가》 등과 같이 인민들의 애국적투쟁을 반영한 가요를 비롯하여 여러가지 가요들이 많이 창작되였다.

• 향가의 창작

이 시기 민족시가형식으로서 향가도 발생하였다.

향가는 리두에 의하여 창작된 시가이다.

대표적작품으로서 《풍요》, 《서동요》, 《혜성가》를 들수 있다.

신라에서 창작된 향가는 기본적으로 우리 말 표현에 의거하여 창작된 독특한 형태의 서정시로서 그 이후 우리 나라 시가발전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 한시의 창작

이 시기 한시작품으로 지금까지 전해져내려오는것으로는 《우중문에게》, 《황조가》(꾀꼴이노래), 《외로운 바위》, 《인삼노래》 등을 들수 있다.

서정시 《우중문에게》는 612년 수나라와의 전쟁시기 적에 대한 총공격을 앞두고 을지문덕이 적장 우중문에게 보낸 편지형식의 작품이다.

이 시는 외적과의 싸움에서 견결하였던 고구려인민들의 애국심과 투지, 슬기로운 기상이 잘 반영되여있다.

《외로운 바위》는 아름다운 자연속에서 우뚝 솟은 바위의 모습을 통하여 고구려사람들의 씩씩하고 름름한 기상을 노래하고있으며 《인삼노래》에서는 고구려의 명산물인 인삼을 자랑스럽게 노래하고있다.

△ 음악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음악만 놓고보더라도 우리 나라는 세계적으로 악기가 맨먼저 발전한 나라의 하나입니다.》

ㅡ 삼국시기 음악이 크게 발전하였다.

세나라사람들이 창작한 노래들은 아름다운 조국강산과 부모처자에 대한 사랑, 로동의 희열과 행복에 대한 지향 등을 반영한것과 함께 원쑤에 대한 증오, 불합리한 사회제도에 대한 비판, 고통스러운 처지에 대한 울분을 담은것 등 그 주제령역이 폭넓고 다양하였다.

세나라가요들가운데서 《인삼노래》, 《황조가》(꾀꼴이노래), 《정읍사》는 대표적인 작품에 속한다.

이 시기 수십종의 현악기, 관악기가 갖추어져 있어 기악도 발전하였다.

현악기로서는 가야금, 거문고, 공후, 환합 등이, 관악기로서는 뿔나팔(각), 피리, 저대, 소 등이, 타악기로는 북과 종이 있었는데 그 종수만 하여도 고구려것만도 38종이나 되였다.

 

 

훌륭한 악곡들도 많이 창작하였는데 가야금곡은 185곡, 거문고곡은 100곡, 저대곡은 860곡이나 되였다.

왕산악백결선생에 대한 기록을 놓고도 알수 있는바와 같이 세나라사람들은 연주술도 높았고 연주형식도 독주, 합주같은것도 있었다.

대표적으로 고국원왕릉의 무덤벽화에 그려져있는 고구려고취악단을 들수 있다.

 

 

 

고구려고취악단

 

ㅡ 세나라시기에는 무용과 교예도 발전하였다.

 

 

 

대표적인 무용으로는 창춤, 북춤, 칼춤, 활춤, 갑옷춤과 군무 등의 군사무용과 두레춤과 같은 농악무를 들수 있으며 말타기재주, 손재주, 발재주, 칼쓰기재주 등 여러가지 교예도 발전하였다.

△ 미술

― 그림

고구려고분벽화는 삼국시기의 그림 더 나아가 이 시기 미술전반의 높은 발전면모를 잘 보여준다.

고구려벽화무덤으로서는 지금까지 알려진것이 100여기나 된다. 이 무덤들에 그려져있는 벽화는 주제가 매우 다양하고 시기에 따라 끊임없이 변천되였다.

4~6세기 초엽에는  고국원왕릉, 덕흥리무덤벽화와 같이 봉건통치배들이 호화로운 생활을 꿈꾸면서 자기들의 생활풍속을 주로 그린 인물풍속도(人物風俗圖)가 대표적인것인데 이 그림들은 당시의 생활을 생동하게 펼쳐보여주고있다. 제한성은 봉건통치배들을 곱게 그리고 인민들은 초라하게 그린것이다.

6~7세기에는 주로 사신도(四神圖-靑龍, 白虎, 朱雀, 玄武) 를 많이 그렸다. 그것은 계급적모순이 첨예화되면서 봉건통치배들이 죽은 다음의 《안전》을 위해 무덤수호신으로 4신을 그리도록 하였다.

사신도로서 대표적인것은 강서세무덤의 벽화를 들수 있는데 환상적인 동물을 그린것이지만 중세미술사에서 걸작으로 인정되고있다.

이 시기 그림들은 조선화의 고유한 특징이 잘 살아나있는데 조선사람의 억센 힘이 넘치면서도 섬세하고 우아하며 천수백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그대로 보존되고있다.

백제와 신라의 그림으로서 오늘까지 전해지고있는것은 그리 많지 않다.

부여 릉산리1호무덤과 공주 송산리6호무덤의 벽면에는 사신도가, 천정에는 련꽃무늬와 구름무늬가 그려져있다.

그중에서 릉산리1호무덤의 벽화는 그 내용과 화풍에서 고구려벽화무덤인 평양시 력포구역 룡산리1호무덤의 벽화와 공통점이 많다. 이것은 백제그림이 고구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것을 보여준다.

― 조각

당시 조각의 재료는 돌, 흙, 나무, 금속과 같은것들이였다.

세나라사람들은 나무를 깎거나 돌을 쫓는 방법, 주물, 흙빚기 방법, 형타에 넣어 두드리는 방법 등 여러가지 방법으로 조각을 창작하였다.

 

 

조각에서 유명한것은 불상조각인데 고구려의 대성산성에서 나온 불상, 백제의 서산(충청남도)의 벼랑조각, 광륭사의 반가사유상을 들수 있다.

― 공예

당시 금속공예가 유명하였다.

고구려의 금동뚫음무늬(투각)장식품(청암동, 룡산리 출토), 신라의 금관(내관, 외관의 두개관으로 되였고 금판으로 만듬, 비취옥구슬과 보요를 금실로 달아맴), 금귀걸이, 백제의 라주 금동관이 대표적인 금속공예품들이다.

공예품들은 주로 귀족들의 사치생활에 리용되였다. 그러나 이런 속에서도 세나라공예가들의 창조적지혜와 예술적재능의 일단을 엿볼수 있다.

△ 건축

세나라인민들은 건축예술도 높은 단계에 끌어올렸다.

세나라시기 건축술의 발전면모는 왕궁과 절간, 무덤들에서 뚜렷이 찾아볼수 있다.

― 왕궁건축

세나라시기 왕궁건축물로서 대표적인것은 고구려의 안학궁과 평양성이다.

안학궁은  427년부터 고구려의 왕궁으로 되였는데 그 두리에 정방형으로 성벽을 쌓아 궁성을 만들었다.

 

 

 

안학궁(상상도)

 

안학궁의 건축면적은 약 38만㎡이고 성벽의 매 면의 길이는 622m나 되며 그안에 길이 87m, 너비 27m되는 중궁을 중심으로 배치된 20여채의 건물이 있었다. 

안학궁은 건축군형성에서 고구려인민들의 훌륭한 재능을 잘 보여주고있다.

기본건물을 남북중심축우에 배치하고 그 좌우에 보조건물을 대칭적으로 배치하였으며 뒤로 가면서 건물터를 높여 립체감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모든 궁전건물은 회랑으로 련결되여있었다.

평양성은 고구려가 552~586년에 둘레가 16㎞, 성벽 총길이 23㎞ 되게 쌓은 성이다. 평양성은 산성과 평지성의 우점과 자연지리적조건을 잘 리용하여 쌓은 우점을 가지고있다. 정연한 봉건도시의 면모를 갖춘 4개의 부분성과 리방제로 구획을 가르고있다.

고구려의 안학궁과 평양성은 고구려건축예술의 뛰여난 경지를 집약적으로 보여주고있다.

― 절간과 탑건축

세나라시기 불교가 전파되면서 많은 절간들이 건축되였다.

이 시기 대표적인 절간들로서는  고구려의 정릉사, 광법사, 금강사, 신라의 황룡사, 백제의 미륵사 등을 들수 있다.

5세기경에 동명왕릉앞에 건설된 정릉사는 약 3만m 나 되는 부지안에 10여채의 건물로 이루어진 1탑 3금당식의 큰 절간이였다. 당시에는 절간건축에서 탑을 제일 중요한 구성부분으로 하였는데 정릉사탑은 8각7층 나무탑이며 8각탑으로서는 제일 오랜것이였다.

6세기 중엽에 경주에 세워진 신라의 황룡사는 처음 1탑 1금당식의 절간이였는데 후에 1탑 3금당으로 개조하였다. 절간에 225척(약 78m)이나 되는 9층으로 된 나무탑이 있는데 이것은 당시 목조건축으로서는 가장 높은것이였다.

7세기 전반기에 지은 백제의 미륵사는 그 절간배치가 독특한것으로 하여 당시 건축술의 높은 발전수준을 잘 보여주고있다.

미륵사의 중심과 동쪽, 서쪽에 3개의 탑과 금당이 설치되여있다. 3개의 탑은 나무탑이 돌탑으로 넘어가던 첫시기의 탑으로서 현재 6층(약 14m)만이 남아있는데 그 비례로 보아 9층 23m로 추측되고있다.

세나라시기의 절간들은 각각 규모가 크면서도 독특한 형식을 취하였으며 다같이 건축술의 높은 발전수준을 보여주었다.

― 무덤건축

세나라시기의 건축술의 발전면모는 무덤건축에서도 찾아볼수 있다.
   무덤건축에서 대표적인것은 고구려의 동명왕릉, 고국원왕릉, 강서세무덤, 장군무덤 등을 들수 있다.

 

 

동명왕릉은 평양시 력포구역 룡산리에 있는 고구려시조 동명왕의 무덤이다. 동명왕릉은 고구려가 5세기경에 평양으로 천도할 당시 옮겨온 무덤이다. 무덤은 고구려의 전형적인 무덤형식인 돌칸흙무덤으로서 무덤내부에  련꽃무늬벽화가 그려져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동명왕릉의 주인공문제와 관련한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시고 그것을 새로 개건하도록 현명하게 이끌어주시였다.

수령님께서는 동명왕릉의 주인공문제에 대하여 명철하게 밝혀주시였다.

지난시기 학자들은 력포구역 룡산리 동명왕릉의 주인공문제를 놓고 진짜가 아니라 가짜라고 주장하면서 오래동안 론쟁하고있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1974년 1월 23일 동명왕릉은 도읍을 옮길 때 옮겨온 무덤으로 보아야 한다고 가르쳐주시면서 그것을 발굴할 과제를 김일성종합대학 력사학부에 주시였다. 1년간에 걸친 발굴과정에 련꽃무늬벽화와 왕관의 잔편 그리고 왕릉앞에서 정릉사터가 발견됨으로써 어버이수령님의 교시의 정당성을 과학적으로 론증할수 있게 되였다.

어버이수령님과 위대한 장군님의 현명한 령도에 의하여 동명왕릉은 동방의 천년강성대국 고구려의 시조릉답게 웅장하게 개건되게 되였다.

 

동명왕릉은 한면의 너비가 32m이고 높이가 11.5m나 된다. 그리고 왕릉주위에 상돌, 두개의 범조각상과 석등, 망주석, 문무관상 8개, 말 8마리, 돌향로와 돌련꽃, 제당, 릉문, 동명왕릉개건비와 각종 비들, 정릉사 등이 있다. 왕릉주변에는 동명왕을 도운 충신들, 애국명장들의 무덤들이 있다.

 

 

5세기 초에 만들어진 장군무덤(집안)은 높이 13m, 한변의 길이가 34m나 되는 7개 층으로 된 큰 무덤인데 넓은 둔덕우에 자리잡고있어 위엄있고 웅장하게 보인다.

 

 

고국원왕릉은 마치 지상에 있는 궁전살림집처럼 만들어졌다. 무덤은 안칸을 중심으로 전후좌우에 6개 칸이 배치되여있어 내부공간이 넓고 깊은 감을 주며 웅장하게 보이도록 되였다. 천정은 공간을 높이고 시원하게 처리하기 위하여 평행4각고임천정을 하였다. 벽은 큰 판돌들로 둘러막았는데 북쪽회랑의 북면판돌은 9.4m나 된다. 무덤칸 벽면들에는 여러가지 내용을 담은 인물풍속그림이 그려져있어 무덤의 내용과 의의를 뚜렷이 하여준다.

이처럼 세나라시기 우리 인민들의 창조적활동에 의하여 문화분야에서 커다란 발전이 이룩되였다.

 

복습문제

-고구려벽화가 그려져있는 대표적무덤과 위치, 벽화내용에 대하여 설명하시오. 

-삼국시기 일본에 건너가 발전된 문화를 보급한 대표적인 인물들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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