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과학과 기술

 

△ 천문학과 기상학

세나라에서는 농업발전의 요구에 따라 천문학과 기상학이 일찍부터 발전하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우리 선조들은 7세기 전반기에 벌써 세계에서 이름있는 천문대인 첨성대를 건설하여 기상학과 천문학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습니다.》     

삼국시기 우리 나라 천문학과 기상학은 세계적으로 앞서나가고있었다.

세나라에서는 《일관부》, 《천문박사》 등 천문기상현상을 전문적으로 연구관찰하는 관청을 설치하고 학자들을 배치하였다.

천문학자들은 초기에는 주로 눈으로 관측하는 방법으로 기상현상과 천체의 움직임을 관찰하였으며 관측자료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그에 기초하여 기상천문현상들의 합법칙성을 알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 부분에 대한 지식이 더욱 깊어가고 탐구심이 높아감에 따라 점차 기구들과 설비들을 만들어 리용하는데로 나갔다.

- 고구려에서 천문기상학의 발전

고구려에서는 평양부의 남쪽 3리밖에 천문대(첨성대-瞻星臺,《세종실록》지리지 평안도 평양부조)를 건설하고 거기에 천문관측을 전문하는 사람(일자)을 파견하여 관측사업을 체계적으로 진행하여 기록에 남기도록 하였다. 고구려의 천문학자들은 일식, 살별(혜성), 별찌(류성), 행성 등을 관측하고 모두 29건에 달하는 기록을 남기였다. 특히 640년에 태양의 표면에 나타난 흑점(유럽에서는 1619년 이딸리아의 갈릴레오 갈릴레이에 의하여 태양흑점이 발견되였다.)을 발견하고 기록에 남기였다.

천문관측성과에 기초하여 고구려에서는 5세기 말~6세기 초에 석각천문도(돌에 새긴 별자리그림)가 만들어졌다. 이 천문도에는 1 464개의 별들이 282개의 별자리들에 표시되여있고 천문리론과 력법계산에 필요한 자료들이 밝혀져있다. 이 석각천문도를 대본으로 하여 1395년에는 《천상렬차분야지도》를 만들었다.

 

 

고구려에서는 여러가지 기후현상도 관측하여 기록에 남기였다. 대표적인것은 가물과 큰비, 폭풍, 우박과 서리가 많이 내린 자료, 겨울에 우뢰가 울고 꽃이 핀 이상기후현상들을 기록한것들을 들수 있다.

- 백제에서 천문학의 발전

백제에서도 천문학이 상당한 정도로 발전하였다.

백제에는 6세기 이전에 루각박사(시간측정전문가)와 력박사(력서전문가) 및 일자(천문기상관측자) 등 기술관들이 있었다.

백제의 천문학자들은 일식과 월식, 다섯개의 행성 및 살별 등에 대한 관측을 진행하였고 5세기경에는 《원가력》(동지를 기준으로 만든 력서)을 만들어썼다.

- 신라에서 천문기상학의 발전

신라에서도 일찌기 천문기상학이 발전하였다. 신라에서는 7세기 전반기(선덕왕시기)에 세계적으로 이름이있는 천문대인 첨성대를 건설하였다.

 

 

 

신라의 첨성대는 그 실물이 지금도 경주에 남아있다.

첨성대는 치밀한 설계에 기초하여 정교하게 쌓은 높이가 9.1m, 밑직경 4.9m, 웃직경이 2.9m되며 화강암으로 28단, 가운데 1㎡의 나들문이 있는 석조천문대이다. 

신라의 경주첨성대는 건설초기의 모양과 상태를 그대로 전하고있는 천문대가운데서 세계적으로 제일 오랜것으로 알려져있다.

신라의 기상천문학자들은 수많은 기상천문현상들을 세밀하게 관측하여 기록에 남기였다.

그들은 여러가지 기상현상들 특히 가물, 큰물, 비, 눈, 우박, 바람, 안개 등 이상기후현상들과 눈으로 볼수 있는 모든 별들인 행성, 항성, 혜성(살별), 류성(별찌) 등을 세밀히 관측하고 기록하였다.

여기에서 주목되는것은 별찌에 대한 기록이 많은것인데 이것은 순간적으로 나타나는것이므로 순간도 쉬지 않고 관측이 계속되였다는것을 의미하였다.

△ 의학

― 침구료법의 발전

고구려사람들은 세계에서 가장 일찌기 돌침을 만들어 병치료에 리용한 고조선의 치료경험을 직접 계승하여 각이한 금속재질로 다양한 침들을 만들어 병치료에 리용하였다.

고구려의사들은 거의 모든 병을 침과 뜸으로 치료하였는데 침구술이 능하였으므로 외국에까지 널리 알려졌다.

고대시기 세계에서 가장 일찌기 돌침을 사용하였고 삼국시기에는 금속침을 사용하였다.

― 약물료법의 발전

세나라에서는 침구술과 함께 약물료법도 높은 수준으로 발전하였다.

고구려사람들은 세계에서 처음으로 삼을 발견하여 병치료와 예방에 리용하였으며 그 경험을 이웃나라에까지 널리 보급하였다. 이밖에 고구려에서는 잣, 오미자, 족두리풀(세신), 다시마 등 식물성약재와 왕지네와 같은 동물성약재 그리고 금을 비롯한 금속제약물 등이 널리 리용되였다.

약물의 제조와 리용방법도 발전하였는데 《천금요방》에는 고구려에서 만성위염에 쓰던 처방이 소개되였는데 거기에는 20가지이상의 약재가 들어가며 개별적약재들의 분량을 합리적으로 조절하였다.

신라에서도 약물치료법이 발전하여 다른 나라들에까지 널리 알려졌다.

세나라에서는 찜질, 한증, 온천 등의 치료법도 널리 보급되였다.

― 의서편찬

세나라에서는 의료경험과 지식을 종합체계화한 여려가지 의학서적들을 출판하였다.

고구려에서는 《로사방》이라는 의서를 편찬하였는데 그 가운데서 이름있는 처방들은 당나라에까지 전파되였다.

백제에서는 《백제신집방》이라는 의학책이 편찬되여 국내외에 널리 보급되였으며 신라에서는 《법사방》이라는 의학서적을 편찬하여 병치료에 리용하였다.

이러한 의학서적들은 당시로서는 우수한 의서이지만 실물이 남아있지 않는다. 다른 나라의 의학책들에 이러한 책의 이름과 일부 처방법이 전해지고있다.

△ 금속가공기술

세나라시기에는 기술발전에서도 많은 성과가 이룩되였으며 특히 금속가공기술은 매우 높은 수준에 이르렀다.

― 주조기술발전에서 주목되는것은 대형주조였다.

여러가지 기술공정들이 갱신되여 그 이전시기에는 엄두도 못내였던 대형금속제품을 만들어냈으며 높은 정밀성을 요구하는 복잡한 형태의 제품들도 손색없이 만들어냈다.

신라의 황룡사 장륙불상은 총 21t이나 되며 현재 일본에 있는 동대사의 로사나불상은 백제기술자들에 의하여 만들어진 높이 16m, 무게 380t에 달하는 큰 부처이다.

― 세나라에서는 압연기술과 일반기술도 높이 발전하였다.

평양부근과 평안북도 룡천군 신암리유적에서 나온 금귀걸이와 경주금관무덤과 백제 무녕왕무덤(충청남도 공주시 송산동)에서 나온 금관의 장식들은 모두 두께가 얇고 일정하며 평면이 매끈한 금판을 오려서 만든것이다.

 

 

신라금관

 

그리고 금잎을 달아맨 금실들은 매우 가늘고 일정하다.

집안에서 나온 패쪽갑옷은 작은 쇠패쪽을 여러개 꿰붙여서 만든것으로서 고구려의 높은 주강기술과 단조기술을 보여준다.

세나라시기에는 금속표면에 조각을 하는 조금공예도 발전하였다.

조금공예술은 루금세공술과 뚫음새김(루각)술로 갈라볼수 있다. 루금세공술은 금판 또는 금동판에 좁쌀알만한 금알을 련속적으로 부각시켜 금싸래기무늬를 만든것인데 금동관과 금귀걸이에서 이것을 볼수 있다.

뚫음새김술은 금속판의 바닥을 일정한 도안에 따라 따내여 남은 부분이 무늬나 어떤 모양을 나타내게 하는 장식수법으로서 그것은 고구려에서 특히 발전하였다.

 

 

 

 

진파리 7호무덤(평양시 력포구역 룡산리)에서 나온 해모양뚫음무늬금동치레거리는 뚫음새김의 공예품이다. 그 테두리에는 루금세공술로 금싸래기무늬를 부각하고 안부분은 뚫음새김술로 여러가지 정교한 무늬를 나타냈는데 그렇듯 많은 부분을 도려내면서도 그밖의 부분에 손상이 없게 만든 기교는 놀랄만한것이다.

― 세나라시기에는 도금기술이 더욱 발전하였다.

당시에 도금은 두가지 방법으로 하였다. 그 하나는 수은과 금분을 혼합하여 금속표면에 바르고 가열하여 수은을 증발시키는 방법으로서 이것은 고조선때부터 써내려오던것이였다. 다른 하나의 방법은 공정을 두세번 되풀이하여 밀착시키는 방법이다. 이러한 방법은 흔히 구리에 금을 도금하는데 적용되였으며 당시 대부분의 장식품들은 이 방법으로 만들었다. 대표적인 유물로서는 고구려의 금동보관형치레거리, 백제의 라주 금동관 등을 들수 있다.

세나라시기에 도자기술도 크게 발전하였는데 고구려에서는 여러가지 모양과 크기, 다양한 색갈의 유약을 바른 도기들을 만들었으며 자기도 만들어내기 시작하였다.

△ 력사편찬

세나라에서는 력사편찬사업도 활발히 진행되였다.

세나라의 통치배들은 저들의 반인민적통치를 미화분식하고 인민들에 대한 계급적지배를 강화하는데 참고로 삼기 위하여 력대왕들의 《업적》을 찬양하고 체계화하는 력사편찬사업에 중요한 의의를 부여하였다.
  고구려에서는 600년에 태학박사 리문진이 고구려초기부터 있던 《류기》(100권)를 요약 및 수정보충하여 《신집》(5권)을 만들었으며 백제에서는 375년 박사 고흥이 편찬한 《서기》와 그밖에 《백제신찬》을 비롯한 력사책들이 편찬되였다. 신라에서도 545년 거칠부 등이 《국사》를  편찬하였다.

이러한 책들의 실물은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그것은 세나라이후시기에 삼국시기의 력사를 편찬할 때에 중요한 자료로 리용되였다.

이처럼 세나라시기 과학과 기술이 크게 발전하였으며 그것은 주변나라들 특히 일본에 큰 영향을 미치였다.
세나라에서 과학기술의 발전은 근로인민대중의 슬기와 지혜에 의하여 이룩되였으나 근로인민대중은 국가주권을 쥐지 못한탓으로 그 향유자로 되지 못하고 오히려 봉건통치배들이 그것을 독점하고 호화로운 생활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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