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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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편 조선봉건사회
제1장 첫 봉건국가들의 성립과 발전
제4절 수, 당침략자들을 물리친 고구려인민들의 투쟁
2. 당나라침략자들을 쳐물리친 고구려인민들의 투쟁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인류력사는 자기의 자유와 독립을 위한 투쟁에 결사적으로 궐기한 인민들은 언제든지 승리한다는것을 보여주고있습니다.》   

수나라가 멸망한 후 618년에 당(唐 618~907년)나라가 세워졌다. 당나라는 초기 얼마동안은 자기들의 정치적지반을 꾸리지 못하였고 고구려에 맞설만한 군사, 경제력도 가지고있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고구려에 대하여 평화적관계를 표방하여나섰다.

그러나 얼마 지나서부터 세나라에 조성된 모순을 악용하여 고구려에 대한 침략야망을 품고 그 내정에 로골적으로 간섭하기 시작하였다.

당나라는 645~647년사이에 세차례나 고구려에 침입하였다.

△ 나라의 방위력을 강화하기 위한 고구려의 적극적인 조치

― 고구려봉건통치배들의 당나라에 대한 투항주의적립장

618년 대외정책에서 강경하였던 영양왕이 죽고 그 아우 영류왕이 집권하였는데 영류왕은 당나라에 강경책을 실시하지 못하였다.

당시 당나라집권자는 626년 제형을 죽이고 태자로 되였으며 이해 8월 제애비를 밀어내고 황제가 된 리세민이였다.

고구려왕(영류)을 비롯한 일부 봉건통치배들은 투항주의적립장으로부터 641년에 이르러 《사신》으로 가장한 당나라의 진대덕이 고구려의 여러곳을 돌아다니며 성곽방위시설과 군사비밀, 지리를 탐지하는것을 묵인하였다. 심지어 수나라와의 전쟁승리를 기념하여 세운 경관이라는 건물을 헐어버리는 투항주의적태도를 발로시켰다.
   이처럼 영류왕을 비롯한 일부 집권세력은 당나라에 계속 투항주의적인 양보정책을 실시하였으며 이로하여 고구려내부에서는 불만이 높아갔다.

― 642년 연개소문의 정변과 강경정책의 실시

연개소문의 정변

서부대인(연나부귀족우두머리) 연개소문은 반대파귀족들가운데서 가장 견결하고 유력한 사람으로 알려졌다.

 

 

연개소문(상상화)

 

고구려는 당시 당나라의 침략기도에 대처하여 631년 부여성으로부터 바다가에 이르는 1 000여리의 장성을 쌓기 시작하였다. 연개소문은 642년 초 천리장성축조공사(부여성부터 발해만사이)를 감독할 과업을 받고나가 여기서 정치적지반을 다졌다. 642년 10월에는 수도로 돌아와 열병식을 조직하여 100여명의 고관들을 초청하고 영류왕과 고관들을 처단하는것으로써 정변을 단행하였다.

정변이 성공하자 연개소문은 영류왕의 조카 장(보장왕)을 새 왕으로 들여앉히고 자신은 막리지가 되여 나라의 모든 권력을 틀어쥐였다.

연개소문이 일으킨 정변은 봉건통치층안에서 벌어진 정권쟁탈전이기는 하지만 당시 부패한 봉건통치배들의 당나라에 대한 아부굴종행위를 반대한것으로 하여 고구려력사발전에서 긍정적의의를 가지는 사변이였다.

집권후 연개소문은 국방을 강화하고 당나라에 강경한 외교정책을 실시하였다. 그는 군대를 증강하고 장비를 개선하였으며 천리장성축성공사를 다그치는 동시에 료하동쪽일대의 성새를 수리보강하는 사업을 적극 진행하였다.

644년 당태종이 사신을 파견하여 신라에 대한 공격을 중지할것을 요구하였으나 고구려는 당나라의 권고를 단호히 거부하였으며 당나라가 사신 장엄을 고구려에 다시 파견하여 위협하자 연개소문은 그를 토굴속에 가두고 돌려보내지 않는 등 강경한 외교정책을 실시하였다.

그리하여 연개소문시기 고구려는 더욱 강대한 나라로 되였다.

△ 당나라침략자들을 쳐물리친 인민들의 투쟁

― 645년 당나라침략자들을 쳐물리친 고구려인민들의 투쟁

 

 

고구려-당전쟁도

 

당나라 태종은 644년 11월 말 침략군을 유주에 집결(수륙군 100만)시켜놓고 644년 12월에는 출발공격준비를 갖추었다. 이렇게 장기간 전쟁준비를 다그쳐온 당태종은 645년 2월 륙지와 바다로 수십만의 침략군을 내몰아 고구려에 침입하였다.

당나라의 전략은 《수륙병진》계획이였는데 바다로부터 수도 평양에 대규모 침략군을 들이미는척 함으로써 고구려방어군의 주력이 수도에 쏠리게 한 다음 그 틈을 타서 료동지방에 저들의 주력을 침입시켜 그 일대의 국경방위성들을 강점하고 국내깊이 쳐들어가자는것이였다.

이 침략계획에 따라 당나라의 륙군은 료하중류지방의 고구려성새들인 신성, 개모성, 건안성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였고 적수군은 료동반도남쪽끝에 상륙하여 비사성을 강점하고 북쪽으로 공격해왔다.

• 료동성전투(고구려군사 2만 : 적군 수십만)

5월 6일 적들은 수십만의 대병력으로 료동성을 포위공격하였다.

당태종은 성을 수백겹으로 포위하고 포차(300m사거리), 충차를 비롯한 모든 공성수단들을 다 동원하여 공격하면서 한편으로는 땅굴을 파고 성안으로 들어오려 하였다.

고구려군민들은 그때마다 반공격으로 성을 성과적으로 고수할수 있었다.

이렇게 되자 적들은 충차를 서남쪽 성문옆에 가져다놓고 그우에 기여올라  남풍을 리용하여 다락집에 불을 질렀다. 온 성안이 적들의 화공전술에 의하여 불길에 휩싸였으나 료동성안의 애국적군민들은 불길을 무릅쓰고 원쑤들을 맞받아 영웅적인 결사전을 벌렸다. 그러나 료동성은 력량상 우세한 적들에게 17일만에 강점되고말았다.

료동성은 비록 강점되였으나 적들에게 호된 타격을 안기고 고구려국내깊이 침입하려는 적들의 기도를 저지시킴으로써 전쟁의 전반적승리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 안시성전투(6월 20일~9월 18일까지 88일간)

료동성전투후 전선의 중심은 안시성(지금의 해성부근)이였다. 안시성은 서북변방에서 료동성 다음가는 중요한 성이였으며 전쟁의 운명이 좌우되는 성이였다.

고구려에서는 안시성방어에 큰힘을 넣었다. 당시 안시성에는 10만의 군대와 인민이 있었고 의지가 강하고 싸움을 잘하는 장수이며 지휘자인 양만춘이 있었다.

고구려지휘부에서는 고연수, 고혜진을 지휘자로 하는 15만명의 지원부대를 파견하였으나 지휘관들의 무능성으로 큰 손실을 내였다.

당시 대로 고정의는 적의 수송로를 차단하고 기습으로 적을 피로케 한 다음 칠것을 권고하였지만  공명심에 들떠있던 고연수는 적들의 꼬임수에 넘어가 크게 싸워보지도 못하고 6월 22일 적에게 투항하고말았다.

적들은 성을 겹겹히 포위하고 매일 6~7차 공격(포차, 충차 리용)하였다.

고구려군은 낮에는 성을 지켜 싸우고 밤에는 성밖으로 나가 기습전을 벌렸으며 당태종이 나타나면 더 맹렬히 기세를 올리면서 싸웠다.

 

 

 

고구려군은 적들이 흙산을 쌓고 공격하려는 기도도 분쇄해버렸다.

적들은 7월 14일부터 성의 동남쪽 모서리에 60여일간에 걸쳐 50만의 공수를 들여 흙산을 쌓고 공격하려고 하였다. 이때 고구려군은 성을 흙산보다 더 높이 쌓고 적들을 격퇴하였다. 흙산이 무너지면서 성벽이 무너지자 적들은 그곳으로 밀려들었으며 수백명의 고구려군사들은 희생적으로 반격을 가하여 적들의 흙산을 재빨리 탈취하였다. 당태종은 흙산을 빼앗긴 적장의 목을 베여 내돌리면서 침략군을 내몰았다.

3개월간의 전투에서 고구려군은 적의 대부분을 소멸하였으며 적장 당태종은 화살에 왼눈까지 잃었다.

9월 18일 당태종은 총퇴각명령을 내렸다.

연개소문은 즉시로 추격전을 벌려 만리장성을 넘어 유주까지 진출하였다.

지금도 베이징(유주)북방 30리지점인 베이징시 순의현에는 연개소문과 당태종이 서로 대치하여 만들었다는 군영자리가 전해지고있다.

안시성전투는 고구려인민들의 불굴의 투지와 위력을 남김없이 보여준 자랑찬 전투였다.

― 647년, 648년 당나라침략자들을 쳐물리친 고구려인민들의 투쟁

당나라침략자들은 첫 침략에서 수치스러운 참패를 당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침략전쟁을 도발하였다.

적들은 상대적으로 적은 수의 병력으로 고구려의 변방지역에 자주 침입함으로써 고구려를 피로케 한 다음 본격적인 침략에로 나가는 전술을 썼다.

649년 초 3만의 수군이 압록강하구로 침입하였으나 100여차례의 전투에서 고구려군민들의 용감한 투쟁에 의해 대참패만을 당하고 도망치고말았다.

이처럼 고구려인민들은 전례없는 대규모적인 반침략전쟁에서 빛나는 승리를 이룩하였다.

당침략격퇴가 가지는 의의는 민족의 명예를 떨치고 조국강토를 수호하였을뿐아니라 더 나아가 백제, 신라를 보호하였으며 그후 인민들의 반침략투쟁을 고무추동하였다는데 있다.

승리의 요인은 고구려군민의 높은 애국심과 용감하고 희생적인 투쟁(결정적요인)과 연개소문, 양만춘 등 애국명장들이 전쟁을 능숙하게 지휘한데 있다. 이들은 봉건지배계급출신이였고 그들의 애국주의는 봉건적애국주의이지만 묘한 전략전술과 능숙한 지휘로 민족의 자주권수호에 이바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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