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세나라사람들의 일본렬도에로의 진출과 그 영향

 

삼국시기 세 나라인민들은 일본렬도에 적극 진출하여 마을과 고을, 소국을 이루고 살면서 일본의 정치, 경제, 문화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삼국시기 우리 선조들은 일본에 건너가 건축술, 도자기술을 비롯한 여러가지 기술과 문화를 보급하여 그 나라의 문화발전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 세나라사람들의 일본렬도에로의 진출, 소국들의 역할과 지위

우리 선조들은 세나라시기 초기부터 일본렬도에 진출하여 활발히 활동하였으며 7세기에 일본에서 통일국가가 이루어지고 그것이 발전하기 전까지도 그 안에서 큰 세력을 가지고있었다.

- 세나라사람들의 일본렬도에로의 진출

당시 우리 나라에서 일본으로 가는 길은 여러 길이 있었다. 백제와 가야는 주로 남해안에서 떠나 쯔시마를 거쳐 북규슈지방으로 진출하였으며 신라는 영일만에서 바다를 건너 이즈모지방(시마네현지방)으로, 고구려는 동해안의 항구에서 떠나 바다를 가로질러 고시지방(노도반도일대)에 도착하였다가 기내야마도지방으로 들어갔다.

 

 

세나라사람들이 진출한 이러한 지방들에서는 우리 선조들이 많이 살았으며 그들은 고대시기에 일본에 건너간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소국을 이루고있었다.

기원전후시기 일본에는 소국들이 100여개나 있었고 3세기경에는 30여개의 소국들이 알려져있었는데 그 가운데는 세나라주민들의 소국들도 포함되여있었다.

북규슈지방에 있던 소국은 백제, 가야계통사람들의 나라로서 당시 가장 큰 세력을 이루고있었다. 그밖에 기비, 이즈모, 가와찌, 야마또 등지로 진출하였다.

첫시기에는 주로 가야, 백제, 신라사람들이 많이 진출하였으나 4~5세기 이후 고구려사람들의 노도반도일대에로의 진출이 강화되였다.

진출지에서 세나라사람들은 자기들의 마을과 고을, 소국을 이루고 생활하였다. 특히 북규슈일대에 조선계통소국들이 많았다.

세나라사람들이 형성한 소국들은 방위를 위하여 주변의 산들에 돌로 조선식의 산성을 쌓았으며 산성을 중심으로 그 일대를 차지하고 땅을 개척하였다. 그들은 발전된 기술을 가지고 여러가지 수공업제품을 만들어썼으며 원주민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지금 서부일본의 죠야마, 타이산, 고라산 등 여러곳들에는 조선식산성터가 있으며 세나라의 무덤형식인 돌칸흙무덤떼들이 있다. 이러한 돌칸흙무덤떼는 기내야마도지방에 많으며 특히 고우찌, 야마도지방에는 수백개의 무덤들이 떼를 이루고있다. 이또시마반도에 근 40개의 전방후원분이 밀집되여있는데 직경이 100m가 넘는 우두머리급 무덤도 있다.

 

 

전방후원분(나라현 하시하까유적)

 

이러한 유적들에서는 세나라에서 발전한 여러가지 철기들과 금, 은, 동 세공품들이 많이 나왔으며 돌림판으로 만들고 높은 온도에서 구워낸 세나라식질그릇도 수많이 나왔다.

일본령토에 있던 조선계통의 소국들은 본국과 밀접한 련계를 가지고 자주 래왕하였으며 본국의 정치정세를 민감하게 반영하여 움직이였다.

북규슈지방의 백제계통소국이 신라에 자주 침입하였고 특히 4세기 말~5세기 초에 가야지방에 대대적으로 침입한것은 그들이 본국인 백제의 통치배들이 추진시킨 령토확장정책에 호응한것이였다.

-소국들의 역할과 지위

 

 

 

일본땅에 진출한 조선계통소국들

 

삼국시기 일본렬도에 진출한 고구려, 백제, 신라사람들은 일본의 정치, 경제, 문화 등 여러분야에서 적극 활동하였다. 그들의 소국은 일본에서의 첫 통일국가형성과정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통일국가가 형성된 후에는 그 안에서 강한 세력을 이루고있었다.

일본의 첫 통일국가 야마도정권은 야마도지방에서 강력한 소국을 이루고있던 몇개 호족들의 련합체로 구성된것이였는데 그 가운데서 가장 큰 세력을 가지고있던 와니씨는 백제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학자 왕인의 후손이였다. 그밖에도 고대일본의 호족들가운데는 세나라의 후손들이 적지 않았다. 이들은 야마도왕정안에서 중심세력을 이루고 일본에서의 통일국가체제수립에서 가장 큰 사변이였던 645년의 《대화개신》에서도 주동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뿐아니라 고구려와 백제에서 건너간 불교학자들가운데는 일본의 왕이나 왕자의 스승으로, 그 고문의 역할을 한 사람들도 있었다.

일본왕족의 발생전설인 《천강신화》가 가락국의 시조 수로왕의 전설을 그대로 옮겨놓은 사실도 일본왕실내에서 세나라 이주민들의 세력이 매우 강하였던 사실을 그대로 반영한것이다.

△ 세나라사람들이 일본의 문화발전에 준 영향
    문화적영향은 과학과 기술, 문학과 예술 전반을 포괄한다.
 ― 과학과 기술

5세기 초 일본에 건너가 그곳 문화발전에 크게 기여한 백제출신 학자인 왕인은 유교경전에 정통하고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있어 당시 일본왕의 태자 우지노 와끼이라쯔꼬의 스승이 되였다고 한다.

왕인은 일본땅에 먼저 파견된 아직기(아지끼)의 추천에 의해 일본에 건너갔다고 한다.  왕인은 《론어》와 《천자문》 등의 책을 일본에 전해주면서 읽기와 내용 등을 배워주었다고 한다. 그의 자손들은 대대로 문서, 문필을 맡은 지식인으로 있으면서 일본문화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이뿐만아니라 고구려의 의사 덕래는 의학, 약학을 보급하였으며 화가 담징은 채색, 수차를 보급하였다.

백제사람 관륵은 새로운 력법, 천문학, 지리학을 전수하였다. .

― 건축과 미술

4세기 이후 일본렬도에는 고구려의 영향이 강하게 미쳤는데 그것은 1972년 고대일본의 중심지였던 나라지방에서 발견된 다까마쯔무덤의 실례 하나만 보아도 잘 알수 있다.

 

 

 

이 옛 무덤은 6~7세기(야스까문화시기) 일본의 최고위급귀족의 무덤으로서 그 구조나 벽화가 완전히 고구려의것과 같다.

6~7세기경의 다까마쯔무덤벽화는 일본에서 발굴된 무덤벽화가운데서 제일 잘 그려진 그림으로서 거기에는 인물, 풍속, 4신, 해와 달 등이 그려져있다. 벽화에 그려진 녀인들은 수산리무덤벽화의 녀주인공이나 덕흥리무덤벽화의 녀인들을 방불케 한다. 벽화의 내용과 그 화법이 고구려벽화와 같은것은 고구려사람이나 그 후손들에 의하여 그려졌다는것을 보여준다.

또한 일본의 불교절간인 아스까사는 평면구조(1탑 3금당식)가 고구려의 정릉사, 금강사와 같다.

 

 

 

법륭사의 금당벽화, 다까마쯔무덤벽화, 법륭사의 옥충주자, 광륭사의 미륵보살반가사유상, 법흥사의 관음상 등은 삼국시기의것과 신통히도 같은것이다.

610년에 일본에 초빙되여간 고구려사람 담징은 법륭사의 금당벽에 불교관계의 그림을 그리였다.

 

 

 

금당벽화

 

금당벽화는 12폭의 크고작은 불교관계 그림과 천정밑의 20개의 작은 벽면에 2개씩 그려넣어 비천그림으로 이루어져있다. 이 그림은 세계적으로도 중세그림의 걸작으로 높이 평가되고있다.

담징은 이름난 화가였을뿐아니라 일본에 가서 종이, 채색, 먹만드는 방법, 매돌만드는 기술도 보급한 고구려의 재능있는 학자이며 기술자였다.

622년에 만든 천수국장은 일본에서 제일 오랜 자수공예품인데 이 자수의 바탕그림은 가서일을 비롯한 고구려화가들이 그린것이다.

463년 일본으로 건너간 인사라아는 일본그림의 시조로 알려지고 그 후손들까지도 화가로서 일본의 미술발전에 기여하였다. 백제의 화가 아좌는 일본의 왕자 성덕태자의 모습을 그렸는데 그것이 매우 섬세하고 생동하여 세계적인 거작으로 알려졌다.

ㅡ 음악과 무용

새나라사람들은 일본의 음악, 무용발전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5세기중엽에 신라에서는 일본에 80여명의 음악가와 무용수들을 보내여 음악무용을 가르쳐주였으며 554년에는 백제에서 일본의 요청으로 많은 학자, 기술자들과 함께 음악가 3명을 파견하였다.

612년 백제의 예술가 미마지는 일본 야마도국가에 가서 그곳 사람들에게 음악을 배워주었으며 일본의 아악의 기초를 닦아준 시조로 되였다. 그는 또한 탈춤(기악무)도 보급하였다.

세나라의 영향밑에서 일본에서는 《아스까문화》가 발전하였다. 이 문화가운데서 우수한것들은 대부분 세나라사람들에 의하여 창조되였거나 그 영향밑에서 이루어진것이다,

이렇듯 삼국시기 일본땅에서 우리 선조들의 활동은 매우 활발하였으며 그것은 당시 일본의 사회 및 문화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

△ 일본군국주의어용사가들에 의한 《미마나 미야께》설의 조작과 그 허황성(任那<日本>府)

《미마나 미야께》설의 내용을 보면 야마도국가가 4세기 중엽에 가야(임나)지방을 정복하고 《미야께》를 둔 다음 가야국을 200~300년동안 식민지로 다스렸으며 백제, 신라를 《속국》으로 지배하였다는것이다.

《미마나 미야께》설은 19세기 말엽에 조작된것인데 지금도 되풀이하는것은 일본군국주의자들이 조선침략책동을 합리화하려는것외에 다른것이 없다.

《미마나 미야께》설의 허황성

야마도통일국가가 등장한것은 6~7세기라는 사실을 놓고도 이 설이 얼마나 허황한지 잘 알수 있다.

당시 일본에는 여러개의 독립왕국들이 있었다. 그러므로 동쪽의 야마도가 그것을 뛰여넘어 조선에 진출할수 없다.

고고학적자료를 보아도 명백히 알수 있다.

가야지방에는 일본식 유적유물이 드러난것이 없다.

서부일본에는 B.C. 4~B.C. 3세기경부터 천여년간에 걸쳐 조선사람들의 유적유물이 드러났다.

일본렬도에 조선사람들이 진출하여 소국을 세우고 활동하였는데 그중에 가야국이 있었다. 이것이 후에 야마도왕정에 통합되면서 《미마나 미야께》가 설치되였다. 즉 일본땅에서 벌어진(기비지방의 가야와의 관계)것이라는것이다.

562년 조선의 가야국이 완전히 없어진 다음에도 《일본서기》에 가야(임나국)국이 계속 나오는 사실이 확증되였다.

이것은 일본렬도안에서 벌어진 사실을 조선반도에 옮겨다놓은것이라는것을 명백히 보여준다.

 

복습문제 

-고구려의 국가직할지인 고을들의 대부분이 성 또는 성웁으로 이루어져있은 리유는 무엇인가.  

-신라봉건국가의 중앙과 지방통치기구들에는 어떤 제도에 따라 귀족관료들을 배치하였는가. 

-세나라의 문화가 일본에 준 영향에 대한 대표적인 실례를 3가지 이상 드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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