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백제와 신라, 가야의 변천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자연을 변혁하고 사회를 발전시키는것도 인민대중이며 물질적부를 창조하고 문화를 발전시키는것도 인민대중입니다.》 

백제, 신라, 가야에서도 자연과 사회의 여러분야에서 일정한 발전을 이룩하였다. 그 바탕에는 인민대중의 자주적이며 창조적인 노력이 깃들어있다.

△ 백제의 변천

- 령토의 확장

백제는 성립이후 4세기 중엽까지 령토를 부단히 넓혀 점차 비교적 큰 나라로 발전하였다.

백제는 초기에 진한과 마한에 대한 공세에 힘을 집중하면서 동쪽과 남쪽으로 령토를 넓혀나갔다. 3세기 말경까지 백제는 마한의 전지역을 차지하고 남해바다가에까지 진출하였다.

백제는 3~4세기경에 북쪽으로도 령토를 넓혀 고구려와 대치하였다. 3세기 말경에 황해도남부지역을 차지하고 더 진출하려고 기도하였으나 고구려와 충돌하기 시작하였다. 371년, 377년 두차례에 걸쳐 고구려의 남평양(신원, 재령일대)을 공격하였으나 390년 광개토왕시기에 들어서면서 좌절되게 되였다.

- 봉건관계의 확대강화

백제는 인민들에 대한 봉건적지배를 강화하기 위하여 중앙과 지방의 통치기구를 정비강화하였다.

260년에 6개의 부문별중앙관청의 장관들로 이루어진 6좌평제도를 정비하였다.

이것은 백제의 중앙통치기구가 한층 정비되여있었다는것을 보여준다.

408년에 좌평우에 상좌평(上佐平)을 두었는데 상좌평은 최고벼슬로서 고구려의 국상과 같았다.

그후 중앙통치기구가 더욱 정비보강되였다. 백제는 통치체계에 21개의 관청을 두었는데 왕실사무담당관청으로서 내관 11개와 구가사무담당관청인 외관 10개를 설치하였다.

- 경제력의 강화

백제인민들은 기름진 평야와 온화한 기후, 풍부한 물자원 등 유리한 자연조건을 리용하여 농업생산을 늘여나갔다.

일찍부터 여러가지 철제농구들을 널리 리용하여 농사를 지어온 백제인민들은 쇠보습, 괭이, 쇠스랑, 쇠낫 등을 리용하여 농업생산을 늘였으며 영농방법을 끊임없이 개선하여 불역전법을 일정한 범위에서 적용하였다.

이것은 지력을 인공적으로 높이는 방법이 창안도입된데 토대하여 이룩된 성과였다.

관개공사도 일정하게 추진되였다.  백제는 330년 벽골제를 건설(전라북도 김제군)하였는데 뚝의 길이가 1 800보였으며 물댈수 있는 면적 9 840결에 달하였다.

백제에서는 금속가공기술과 요업, 직조업, 목제품가공 등 수공업도 발전하였다.

백제에서는 농업과 수공업이 발전함으로 하여 상업도 발전하였다

백제에서의 봉건관계와 경제발전은 인민들에 대한 봉건적인 압박과 착취의 강화를 전제로 하였다.

인민들은 봉건적인 압박과 착취를 반대하여 줄기차게 투쟁하게 되였으며 그것은 백제봉건국가의 몰락과정을 촉진시켰다.

- 백제는 4세기 70~80년대까지 번성하였지만 그후 점차 쇠퇴기에 들어서기 시작하였다.

백제가 쇠퇴하게 된 주요한 원인은 고구려의 적극적인 남진정책에 있었다.

390년대부터 시작된 백제에 대한 고구려의 공세는 6세기 20년대~30년대에 더욱 강화되여 백제는 수도를 수차례 옮기며 쫓겨다니지 않을수 없었다.

그러다나니 중앙집권적통치체제는 더욱 혼란에 빠지고 인민들의 처지가 더 비참해졌다.

이처럼 계속되는 전쟁과 안팎의 공세, 빈번한 권력다툼, 인민들의 반봉건투쟁 등으로 하여 백제는 7세기에 들어와서도 약화된 자기의 국력을 추켜세울수 없었다.

△ 신라의 변천

세나라 가운데서 가장 뒤늦게 국가를 형성한 신라는 5세기 중엽까지 고구려와 우호관계를 맺고 그의 보호밑에 점차 국력을 강화해나갔다.

신라봉건통치배들은 주변소국들을 하나하나 통합하면서 그에 맞게 봉건적관계들을 부단히 정비강화해나갔다.

- 봉건통치제도의 정비강화

신라봉건통치제도 정비강화의 전반적방향은 봉건적중앙집권을 강화하는것이였다.

초기에는 왕권이 일정한 제한을 받았다. 그것은 백제의 최고위급귀족들의 평의기구인 화백과 지방에 제후들이 존재하기때문이였다.

그러나 점차 국왕을 우두머리로 하는 봉건적중앙집권이 강화되여나갔다.

신라는 3세기 말경까지 제후국들을 기본적으로 제거하였으며 4세기 중엽부터 박, 석, 김 세왕성가운데서 김가에 의한 왕자리세습제도를 확립하였다.

531년에는 최고관직인 상대(고려시기 사헌부와 같음) 등을 내오고 그를 화백의 수석으로 앉히므로써 화백을 왕에게 종속시켜놓았다.

6세기 이후 주와 소경을 설치하여 지방관제를 크게 정비하였다.

규모가 큰 주들을 설치하고 군주(軍州)를 그의 장관으로 임명하였으며 주밑에 군, 군밑에 현을 설치하였다.
신라는 왕권의 지방통치를 강화하고 지방세력의 팽창을 누르기 위해 소경(小京)제도를  실시하였다.

군대수를 늘이고 군대제도를 정비보강하여 전기신라 마지막시기에는 군대수가 10만명 정도에 이르렀다.

- 계급신분제도 정비강화

신라는 저들의 봉건적지배를 강화하기 위하여 지배계급에 속하는 신분을 귀족으로 하고 그 내부에 또 골품제를 적용하여 신분의 차이를 두었다. 골품제에서 골제는 성골과 진골로 나누는데 이것은 왕이 되는 기본 신분층이였으며 품제는 6두품, 5두품, 4두품으로 나누어 관직을 규정하였다.

피지배계급에 속하는 신분에는 량인(良人), 부곡민(部曲民), 노비(奴裨) 등이 있었다.

이들은 신라봉건국가의 기본착취대상이였다.

- 생산의 발전

신라에서는 인민들의 근면한 로동에 의하여 생산이 발전하였다.

농업이 상당히 발전하였는데 부침땅면적이 늘어나고 수륙겸종법을 비롯한 선진적인 영농방법이 창안되였으며 불역전의 비중이 늘어났다.

전기신라시기에 봉건말기에 볼수 있었던 거의 대부분의 농기구가 제작리용되였으며 429년 뚝의 길이가 2 170보나 되는 저수지를 건설하였다.

수공업도 발전하였는데 금속가공업, 질그릇제조, 배무이, 직조, 무기제작 등 여러분야에서 발전하였다. 그중 금속제련 및 가공업을 본다면 쇠부리수공업(경주금관무덤에서 700여점의 철정, 3상자분의 철판 출토), 금은귀금속가공업(금관무덤에서 금제품만 7.5㎏), 청동주조업[황룡사 장륙불상-구리 3만 5천斤(약 21t), 금도금 1만 198푼(약 3.7㎏) 단번에 주물]이 상당한 수준으로 발전하였다.

※ 1斤=600g=16량(당시의 근과 오늘날의 근이 같지 않았다는 설도 있음), 1푼=1/100량=0.375g

특히 황룡사 장륙불상 하나만 놓고보더라도 인디아를 비롯한 여러 나라들에서 거듭 실패한것을 신라에서 단번에 주조하여 성공하였다.

- 령토확장

신라의 봉건통치배들은 나라의 힘이 커지자 주변나라들과의 전쟁을 자주 벌려놓고 령토를 넓혀나갔다.

신라는 5세기 중엽이전까지 고구려와 우호관계를 맺고 그의 보호를 받았다.

신라의 왕들은 자기를 고구려왕의 노객(奴客)이라고 하면서 고구려의 보호밑에서 자기 존재를 유지하였으며 그의 각종 제도와 문화를 받아들여 나라를 발전시켜나갔다.

그러나 신라통치배들은 점차 고구려를 배반하고 6세기 이후 백제를 고구려와의 대결에로 부추기면서 자기의 지반을 다지고 령토를 넓혀나갔다. 551년에 신라는 죽령이북 고현(철령)이남의 고구려의 10개군을 탈취하였으며 553년에는 백제가 차지하고있던 한강하류지역을 배신적으로 점령하였다. 고구려가 주로 백제에 대한 공세를 취하는 기회를 리용하여 562년에 가야지방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특히 진흥왕때인 560년 말에 령토를 상당히 넓히였다.

진흥왕시기 신라는 강원도북부-리원일대까지 진출하였는데 새로 차지한 령토를 확장하기 위하여 돌아본 곳들에 세운 진흥왕순수비 4개가 지금까지 남아있다.

 

 

서울북쪽 북악산과 경상남도 창녕, 함경남도 황초령과 마운령에 있는 비석은 이 지방이 일시 신라의 령토로 되였다는것을 보여준다. 신라는 이때 황초령, 마운령일대까지 진출하였으나 고구려의 반격으로 곧 안변일대이남으로 쫓겨났다.

512년 신라는 우산국을 정복하고 울릉도와 그 주변의 독도 등을 자기의 행정구역으로 편입시켰다.

6세기 초이전까지 울릉도에는 우리 선조들이 살았으며 그들이 세운 우산국이 있었다. 이러한 우산국이 신라에 잘 복종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신라는 하슬라주의 군주였던 이사부를 파견하여 그를 복종시키고 신라의 행정구역으로 만들었다.

7세기 10년대이후 신라는 자기의 야망을 실현하기 위하여 외적을 끌어들이려고 기도하였다.

고구려와 백제가 6세기 후반기이후 점차 접근하자 신라는 동족의 나라들로부터 고립당하게 되였다. 그러자 신라는 외세와 결탁하는 길로 나아갔다.

이것은 나라와 민족의 발전을 크게 저애하는 해독적작용을 하였다.

△ 가야의 변천

가야는 성립후 정치, 경제, 문화 등 여러면에서 큰 발전을 이룩하였다.

오래동안 락동강하류일대에서 신라와 맞서 싸웠으며 특히 4세기 중엽이후에는 백제와 동맹관계를 맺고 신라, 고구려와 맞섰다.

6세기에 들어서면서 신라의 강한 압력에 눌리워 이 시기부터 가야국들이 하나하나 신라에 병합되기 시작하였는데 532년 금관국이 투항(구형왕)하고 562년 대가야국을 신라가 무력으로 통합하였다. 562년 싸움때 가야군의 사다함(부책임자)이 거느린 군대만도 5천명였다. 이것은 대가야가 마지막시기까지도 만만치 않은 세력이였음을 보여준다.

신라에 의한 대가야국의 통합을 계기로 가야국은 자기의 존재를 마치였으며 그 령토는 신라의 령토로 병합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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