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후부여와 백제, 신라, 가야의 성립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조선민족은 오랜 세월 한강토에서 하나의 언어와 문화를 가지고 살아온 단일민족입니다. 우리 나라에는 그 어떤 소수민족도 없습니다.》  

△ 후부여의 성립

후부여는 B.C. 2세기 초에 고대부여를 계승하여 성립된 봉건국가였다.

- 성립과정

고대부여는 B.C. 219년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큰 손실을 당한 후 그 통치집단이 와해되여 일단 멸망하였다.

고대부여가 무너진 다음 부여는 고구려의 속국으로 전락되였다. 그러나 이때 부여의 령토와 주민이 다 고구려의 직접적인 통치체제밑에 들어간것은 아니였다. 부여는 남쪽의 일부 지역을 제외한 대부분의 령역과 주민을 계속 통치하면서 다만 고구려에 신속되였을뿐이였다. 그리고 부여의 통치층안에서 분렬이 일어나기는 하였으나 부여왕실의 《권위》는 그대로 보존되여있었다.

부여가 봉건국가 고구려의 통제밑에 있게 됨으로써 부여에서의 사회관계가 보다 빨리 봉건적인것으로 개편되여나가게 하였으며 신흥봉건세력의 장성을 급속히 촉진시켰다.

그리하여 부여는 점차 내부의 분렬을 극복하고 국력을 키워 B.C. 2세기 초엽경에 다시 독자적인 봉건국가로 등장하게 되였다

새로 형성된 부여국은 신흥봉건세력을 중심으로 하여 꾸려진 봉건국가였다.

이때 세워진 봉건부여국도 나라이름을 전과 다름이 없이 《부여》였다. 이를 고대부여와 구별하기 위하여 《후부여》라고 부른다.

후부여가 봉건제도에 기초한 나라로 된것은 당시 봉건사회에로의 이행이 부여사회발전의 합법칙적요구였기때문이다. 즉 인민대중이 더는 노예제도하에서 살것을 원하지 않았으며 또 생산력의 발전이 능히 봉건관계를 수립할수 있는 높은 수준에 이르고있었기때문이였다.

그리하여 부여의 신흥봉건세력들은 왕족가운데서 유능하고 신망이 있는 자들을 내세워 봉건적인 질서밑에 부여지역의 분렬을 극복하고 다시 하나의 국가단위에 묶어세우게 되였으며 고구려의 예속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나라로 되였다.

- 새로 성립된 후부여는 봉건적인 관계에 기초하여 국가통치체제를 세워나갔다.

후부여는 고대부여때의 관직제도를 계승하여 마가, 우가, 저가, 구가 등을 최고관료로 하고 대사자, 사자, 등 각급 벼슬등급을 가진 관리들을 두고 부여국을 통치하였다.

- 후부여국의 령역은 고대시기보다 남쪽은 얼마간 줄어들었으나 읍루(부여의 동쪽에 이웃하고있던 종족)를 복종시킴으로써 동쪽은 더 넓어졌다. 후부여의 수도는 처음에는 길림부근에 있다가 얼마후 농안의 서남 회덕부근으로 옮겼다.

△ 백제의 성립

백제는 B.C. 3세기 중엽 진국의 북부지역(례성강-한강일대)에서 하나의 봉건소국으로 형성되였다가  B.C. 1세기 말엽에 독자적인 봉건국가로 등장하였다.

- 성립과정

《삼국사기》를 비롯한 여러 국내외 력사책들에 실려있는 《온조전설》등과 기록자료들, 고고학적자료들은 백제의 건국년대와 건국과정을 일정하게 반영하고있다.

고구려의 건국시조인 동명왕의 셋째아들인 온조가 이끄는 고구려사람들의 한 집단이 백제봉건소국을 세웠다.

B.C. 3세기 중엽경에 례성강-한강하류일대로 이동해온 고구려의 온조집단은 이 지역에서 주도권을 쥐고 하나의 봉건소국을 세우고 점차 세력을 확장해나갔다.

백제봉건소국은 처음에 사방 100리정도의 령토를 가진 작은 나라로서 마한(진국)의 속국으로 되여있었다.

백제에서 마한황에게 사슴 등 공물을 바치기도 하고 《말갈》과의 싸움에서 사로잡은 포로들을 바치기도 하였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은 그러한 사실을 반영한것이다.

소국당시의 중심지는 한강북쪽의 위례성(하북위례성)이였다.

- 봉건화과정의 촉진

봉건소국이 형성된후 그 내부에서 봉건화과정이 급속히 촉진되였으며 국력도 빨리 자라게 되였다.

백제는 정복전쟁과 통합과정을 통하여 북쪽으로는 례성강하류지방, 동쪽은 주양(춘천), 서쪽은 바다, 남쪽은 충청남도 웅천(공주)에 이르는 넓은 지역을 차지하게 되였다.

 

  

 

백제의 령역

 

백제는 그에 토대하여 주변의 마한소국들을 통합하면서 자기의 세력권을 더욱 넓혀나갔다. 이 무렵에 수도를 한강남쪽의 위례성(하남위례성)으로 옮겼다. 백제는 B.C. 1세기 말엽경에 마침내 진국(마한)의 통제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봉건국가로 등장하였다. 

그후 A.D. 8년에 마한을 불의에 기습하여 수도 익산을 점령하였고 계속 공세를 들이대여 그 이듬해에는 고대국가 진국을 무너뜨렸다.

백제는 고구려계통의 귀족들과 본래의 마한귀족들 그리고 토호세력에 의거하여 국가통치체제를 꾸려나갔다.

백제초기의 통치기구는 중앙의 재상급인 좌보, 우보를 비롯한 관료들을 봉건적위계제에 의하여 편성한것이였다.

백제초기에는 전국을 동, 서, 남, 북 등 4부로 나누어 지방행정체계를 세분화하였다.

온조를 우두머리로 하는 고구려의 주민집단, 정치세력에 의한 백제봉건소국의 성립과 독자적인 봉건국가에로의 발전은 우리 나라 서남부일대에서의 봉건경제와 문화의 발전을 더욱 촉진시켰다.

또한 노예소유자국가 진국을 멸망시킴으로써 진국령역전반에서의 봉건관계의 장성과 신라, 가야 등 봉건국가들의 성립에 유리한 조건을 지어준 하나의 사변으로 되였다.

△ 신라의 성립

- 성립과정

신라봉건국가의 성립에 대한 사실은 《삼국유사》에 기록되여있는 박혁거세(朴赫居世)전설에 반영되여있다.

전설에 의하면 박혁거세는 양산촌에서 나서 6촌장들의 추천에 의해 왕이 되였다고 전하고있다.

신라는 처음에 진한의 12개소국의 하나였던 수국들가운데서 하나인 사로국(경상북도 경주지방)이 점차 자라나 성립된 나라였다. 사로국은 B.C. 1세기 초중엽경에 봉건소국으로 형성되였다가 A.D. 1세기 초중엽에 독자적인 봉건국가로 되였다. 

사로국일대에서의 사회발전을 촉진시키는데서 고조선, 고구려계통의 이주민들이 중요한 역할을 놀았다.

B.C. 1세기 초중엽 고조선계통 이주민들이 중심이 되여 경주일대에 사로국(斯虜國)이라는 봉건소국을 세웠다.

B.C. 3세기 중엽경에 동명왕의 옛 신하였던 협보가 남쪽(사로-신라)땅으로 내려갔고 B.C. 2세기 말에 고조선이 무너진 다음 그 유민들이 적지않게 이 일대로 옮겨가 살았다. 이들은 앞선 문화와 기술을 보급하고 봉건화과정을 촉진시켰으며 토착세력과 결합되여 점차 새로운 봉건세력을 이루게 되였다.

그리하여 B.C.1세기 초중엽경에 사로국안에서는 봉건관계가 지배하게 되였으며 결국 사로국은 하나의 봉건소국으로 전환되게 되였다. 사로국은 봉건소국으로 된 다음에도 한동안 진국의 통제밑에 있었다.

그후 사로국이 독자적인 나라로서 봉건국가체계를 기본적으로 갖추게 된것은 A.D. 1세기 초중엽경이였다.

사로국은 진한에서 주도적인 세력으로 등장하여 주변소국들을 적지 않게 통합하고 진국의 통제에서 완전히 벗어났으며 봉건국가로서의 통치체계도 기본적으로 갖추었다.

- 신라의 령역과 수도

신라봉건국가는 소국들에 대한 통합과 봉건적통치체제를 세우는 사업을 벌려나갔다.

 

 

신라의 령역 

 

신라는 A.D. 1세기 초중엽경에 이서국(경상북도 청도군일대)을 비롯한 주변의 소국과 지역들을 적지 않게 통합하였다.

성립당시 신라봉건국가가 얼마만한 령역을 차지하였는가에 대하여 립증할 명백한 자료는 없으나 당시 신라는 경주와 그 주변일대를 직접 관할하면서 진한의 많은 소국들에 주도적영향을 주고있었다.

신라의 령역은 진한의 대부분 지역을 차지하고있었다.

A.D. 32년 종래의 6촌(양산, 고허, 진지, 대수, 가리, 고야)을 6부(급량부, 사량부, 점량부, 본피부, 한기부, 습비부)로 고치였는데 이것은 령역이 넓어지면서 종래의 6촌지역이 수도와 그 주변일대의 6개행정단위로 개편되였음을 보여준다. 

 A.D. 67년에는 고을들에 주주(州主), 군주(郡主)를 파견하여 지방통치제도를 정비하였다.

신라의 수도는 왕경(경주)이였으며 나라이름을 신라(사로, 사라, 서라벌, 서나벌)라고 지었다.

이처럼 1세기 초중엽경에 신라봉건국가가 성립되였다.

△ 가야국의 성립

고대국가였던 진국의 변한지방에서 발생한 가야는 B.C.1세기 초중엽에 봉건소국으로 형성되였다가 A.D. 1세기 중엽에 독자적인 봉건국가로 등장하였다.

- 성립과정

《삼국유사》를 비롯한 여러 력사기록들에 전해지는 가야건국전설(《가락국기》)등과 고고학적자료들은 가야국의 건국과정을 반영하고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가야봉건국가성립직전에 구야국(가야-고대소국)은 9개촌에 7만 5천명의 주민들을 망라한 비교적 큰 나라였다.

구야국은 《간》(한)이라고 불리우는 9명의 촌우두머리들에 의하여 유지되고있었다.

구야국은 당시 노예제도를 반대하는 인민들의 줄기찬 투쟁과 내부에서 싹트고있던 봉건관계, 고구려를 비롯한 먼저 성립된 봉건국가들의 영향 등으로 하여 점차 새로운 봉건관계가 지배적인것으로 되여갔다.

이러한 시기에 김수로를 우두머리로 하는 북방에서 내려온 일정한 정치세력이 이 지역의 토착세력과 결탁하여 주도권을 쥐고 자기의 지배권을 확립하였다.

그리하여 1세기 중엽에 김수로의 금관국(구야)을 중심으로 하는 6개가야봉건소국들의 련합이 이루어지게 되였다. 가야국은 바로 오늘의 경상남북도 락동강 우안지역의 많은 부분과 좌안지역의 일부에 걸쳐 존재하였던 6개봉건소국들의 련합체를 의미하였다.

 

 

가야국의 령역

 

가야국(伽倻)은 일명 가락국, 가라국, 임나국으로 불리웠다. 

 

* 6개 가야국의 이름과 통치지역

금관가야: 경상남도 김해

아라가야: 경상남도 함안

소가야: 경상남도 고성

대가야: 경상북도 고령

성산가야: 경상북도 성주

고녕가야: 경상북도 상주

 

- 가야국의 령역은 시기에 따라 일정하지 않았다.

《삼국유사》에서는 가야의 경계가 동쪽은 락동강, 서남쪽은 바다, 서북쪽은 지리산, 동북쪽은 가야산이라고 기록되여있으나 이것은 어느 한 때의 령역으로 인정된다.

옛 기록과 유적유물의 분포정형 등을 고려해보면 가야의 령역이 가야산이북의 경상북도 성주군, 상주군일대까지 포괄하고있었으며 락동강동쪽의 일부 지역 즉 대구, 창녕지방에까지 미치였다.

이미 진국시기부터 일본렬도에 앞선 문화를 전파해온 이곳 주민들은 고구려, 백제, 신라인민들과 함께 일본땅에 더 적극적으로 진출하여 일본의 사회문화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

가야는 그후 백제와 신라의 공격을 자주 받아오다가 6세기 중엽에 이르러 그 지역이 모두 신라의 령토로 되고말았으며 가야의 귀족들가운데서 일부는 신라의 귀족대렬에 편입되였다.

이상에서 본바와 같이 B.C. 3세기 초엽부터 A.D. 1세기 중엽사이에 우리 나라에서는 력사발전의 합법칙성에 따라 노예소유자국가들이 무너지고 고구려와 후부여, 백제와 신라, 가야 등 봉건국가들이 성립되였다.

 

복습문제

-삼국시기 존재한 봉건국가들의 이름, 성립년대와 건국자를 쓰시오. 

-《미마나미야께설》의 부당성은 어디에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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