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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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편 조선봉건사회
제1장 첫 봉건국가들의 성립과 발전
제1절 고구려를 비롯한 첫 봉건국가들의 성립
1. 고구려의 성립과 초기발전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우리 나라의 첫 봉건국가인 고구려를 세운 시조왕은 동명왕입니다.》  

초기봉건국가들가운데서 제일먼저 성립되고 국력이 가장 강대한 나라는 고구려였으며 삼국시기 우리 나라 력사는 고구려를 중심으로 발전하여왔다.

△ 고구려의 성립 (高句麗成立)

고구려는 우리 나라 력사상 첫 봉건국가로서 근 1000년동안 존재한 동방의 강대국이였다. 이러한 고구려의 건국시조는 동명왕(東明王―朱蒙)이였다.

 

 

 

전장으로 출전하는 고주몽(상상화)

 

고구려는 조선고대국가의 하나인 구려국안에서 발생발전한 봉건적제관계에 기초하고 부여에서 남하하여 온 주몽을 중심으로 한 신흥봉건세력이 주동이 되여 세운 우리 나라에서의 첫 봉건국가이다.

- 고구려는 B.C. 277년 동명왕(추모, 주몽)에 의하여 고대 구려국일대에서 성립되였다.

《광개토왕릉비》, 《삼국사기》, 《삼국유사》를 비롯한 국내의 력사책들과 《위서》, 《주서》등 국외의 력사기록들에는 동명왕의 출생과 그가 나라를 세운 건국과정을 전하는 전설이 실려있다. 

동명왕전설과 그밖의 자료들을 잘 따져보면 고구려의 건국과정을 파악할수 있다.

동명은 B.C. 298년(계해년)에 부여왕실의 한 별궁에서 태여났다. 동명의 아버지는 해모수였는데 부여귀족출신이였다. 어머니는 청하부근의 권력자였던 하백의 딸 류하였다. 류하는 기구한 경로를 거쳐 부여왕실에서 살던중 주몽을 낳았다. 주몽은 부여왕실에서 자라면서 심한 모해와 박해를 받았다. 그러던중 어머니의 도움을 받아 이미전에 사귄 오이, 마리, 협보 등과 부여를 탈출하여 남쪽 구려땅 한 모퉁이인 계루부지역에 자리를 잡았다.

주몽은 초기에 이 일대의 큰 세력자의 딸이였던 소서노의 후원을 받아 자기의 정치경제적지반을 닦아나갔다.

한편 고대말기의 복잡한 환경속에서 위기에 처해 모대기고있던 구려국의 왕은 주몽의 명성에 끌리여 그에게 나라의 장래를 맡길것을 결심하고 그를 사위로 맞아들였다.

그후 국왕이 죽자 주몽이 왕위를 잇게 되였다. 주몽은 당시 장성강화되고있던 봉건세력에 의거하여 자기의 정치적지반을 꾸리고 봉건적인 질서를 세워나갔다. 나라이름도 전신국의 국호인 《구려》에 《고》(高)자를 붙여 《고구려》라고 고쳤다. 이때가 바로 B.C. 277년이였다. 

 

※ 고구려의 성립시기를 B.C. 277년으로 보는 근거:

• 《삼국사기》 등 주몽전설에 한나라와의 전쟁기사, 관계기사가 전혀 나타나지 않는 사실(전한 B.C. 206~A.D. 8년)을 놓고도 잘 알수 있다.

 

이것은 고구려가 고조선이 무너지기전에 선 나라라는것을 말해준다.

•《광개토왕릉비》의 비문의 내용을 통하여서도 잘 알수 있다.

비문에는 광개토왕이 주몽의 17세손으로 되여있다.

그런데 《삼국사기》 등 기록에는 시조왕의 12세손(19대왕)으로 전하고있다. 이것은 고구려의 5세대 왕들이 빠져있다는것을 알수 있다. 즉  ①동명왕, ②유류왕, ③여률왕, ④대주류왕(막래), ⑤애루왕, ⑥??왕(실명), ⑦류리명왕, ⑧대무신왕들이다.

• 900년설《有國九百年說》(《삼국사기》 권22 고구려본기 보장왕 27년조)과 1000년설《千年說》(고구려비기)이 전해지는것, 고구려가 진나라때부터 존재했다는 기록을 통해서 잘 알수 있다.

•《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고구려는 진, 한 이후부터 중국의 동북쪽에 있었다.》고 한 내용과 동명왕이 이전 연나라때 하늘에서 갑옷, 창을 받았다는 기록에서도 찾아볼수 있다.

연나라는 B.C. 222년에 망한 나라이다.

이 모든 자료들은 고구려의 건국년대가 B.C. 277년(甲申年)이라는것을 확증해준다.

중국의 6국을 통일한 진시황이 세운 진나라보다 반세기가 앞선다.

진나라의 성립년대는 B.C. 221년.

 

- 고구려성립당시의 령역은 구려국의 령역과 일치하였다.

 

 

 

고구려의 령역도

 

고구려의 첫 수도는 졸본(환인) ― 혼하상류였다.

고구려는 오랜 력사와 상당히 큰 국토와 강한 국력을 가지고있던 구려국을 토대로 하여 성립되였으며 처음부터 상당히 강대한 세력으로 등장하였다.

고구려는 령토가 확장되고 봉건적중앙집권체제가 강화되는데 따라 A.D. 3년에 수도를 국내성(길림성 집안)으로 옮기였다.

- 고구려의 성립이 가지는 의의

• 고구려의 성립은 우리 나라 력사에서 노예사회보다 한단계 발전된 봉건사회의 시초를 열어놓았다.

봉건제도의 발생발전, 봉건국가의 형성은 우리 인민의 자주성을 위한 투쟁에서 새로운 전진의 계기를 열어놓았으며 고구려의 봉건적관계는 동족의 나라들에 파급되여 우리 나라 전반적지역에서 노예제사회의 붕괴와 후부여를 비롯한 봉건국가들의 성립을 촉진하는 계기로 되였다.

•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은 외래침략세력을 물리치고 민족의 자주권을 고수하기 위한 투쟁을 적극 벌려나가는데서도 새로운 국면을 열어놓았다.

고구려봉건국가의 성립과 강화는 우리 인민의 반침략투쟁을 강화발전시키는데서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고구려는 B.C. 277년에 건국되여 고조선의 옛땅을 되찾기 위한 치렬하고 완강한 투쟁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나간 나라였다.

• 아시아에서 제일 먼저 봉건국가를 일떠세웠다는데 있다.

중국의 진나라보다 50여년이나 앞섰다.

몽골은 13세기에 와서야 봉건국가를 세웠다.

△ 초기발전

고구려봉건국가의 초기발전은 령토확장, 봉건관계의 확대과정과 봉건적중앙집권체제의 확립에서 표현된다.

― 고구려의 초기령토확장

고구려의 초기령토확장은 소국들의 통합과 고대부여국의 정복 두 방면에서 추진되였다.

 

 

• 소국들의 통합

건국이후 고구려는 주변의 여러 소국들과 정치세력들을 통합하여 령토를 넓히면서 국력을 키우고 봉건적인 통치질서를 확대해나갔다.

고구려는 소국을 통합하는데서 귀순 또는 투항하는 소국들은 포섭하고 그렇지 않은 소국들은 무력으로 정복하는 두가지 방법을 적용하였다. 이러한 방법으로 고구려는 비류국(沸流國), 행인국, 북옥저, 량맥국, 개마국, 조나국 등을 통합하였다.

• 고대부여의 통합

고구려는 초기에 부여와의 정면대결을 피하면서 소국들에 대한 통합을 다그쳐 힘을 키워나갔다.

그러다가 마침내 B.C. 3세기 말에 부여와의 본격적인 군사대결에로 넘어갔다.

B.C. 219년 2월 전쟁

고구려 대주류왕이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부여의 수도 남쪽지대에까지 진출하였다.

전투에서 부여의 대소왕이 전사하였으며 1만명의 부여군이 살상되였다.

이 전쟁을 계기로 부여국은 멸망의 위기에 직면하였다. 그후 대소왕의 막내아우가 갈사수(압록강지류)류역에 자리잡고 새 나라를 세웠다. 대소왕의 사촌아우는 1만명의 주민을 데리고 고구려에 투항하였다.

고구려는 부여의 남부지역을 통합하고 나머지땅도 속령, 속국으로 전환(B.C. 3세기 말까지)시켰으며 계속 료서지방으로 진출하여 진나라와 이웃하게 되였다.

고구려의 급격한 장성에 놀란 진시황은 B.C. 214년에 급히 만리장성을 축조하였다. 만리장성은 북쪽으로 흉노, 동쪽으로 고조선, 고구려의 공격이 무서워 쌓은것으로서 그 동단은 산해관이다.

• 소국들에 대한 통합의 기본적인 결속

고구려는 B.C. 2세기경부터 강대한 한나라침략세력과 맞다들게 되였다.

이것은 주변의 소국들을 하루빨리 통합하여 힘을 키울것을 요구하였다.

고구려는 B.C. 1세기 말엽이전에 동옥저지역(함경남도와 함경북도 남부의 일부지역)을 통합하고 A.D. 37년에 락랑국을 정복하였다.

고조선이 무너진후 왕검성(평양)일대에는 최리의 락랑국이 세워지게 되였다.

락랑국의 일부 통치배들은 한나라와 접근하고 고구려를 반대하는 정책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고구려는 락랑국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여 A.D. 32년에 혼인정책을 썼고 37년에는 락랑국을 멸망시켰다.

그후 갈사국, 조나국, 주나국을 통합하였다.

그리하여 A.D. 1세기 70년대전반기에 이르러 소국통합이 기본적으로 결속되였다.

이 과정에 고구려의 령토는 더욱 확대되고 국력은 더욱더 강해졌다.

- 봉건관계의 확대

고구려초기 소국의 통합과 령토확장과정은 전국적범위에서 봉건적중앙집권체제를 확대하여 나가는 과정이였다.

건국초기 고구려는 모든것을 즉시 봉건적중앙집권체제로 개편할수 없었고 통합된 소국들에 대해서도 일률적으로 중앙집권체제안에 포괄시킬수 없었다.

그러므로 고구려는 직할지, 속국, 제후국, 속령 등 여러가지 통치방식을 취하였다.

그러나 왕권과 국력이 강화되는데 따라 속국통치자들의 권한을 무력하게 만들고 나아가 그 지역을 완전히 직할지로 개편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봉건관계는 더 널리 파급되고 봉건적중앙집권적체제가 확대되여나갔다.

- 고구려는 A.D. 3년에 수도를 졸본에서 국내성(집안)으로 이동하였다.

 

 

새 수도 집안은 압록강변의 국내성(통구성-평지성, 둘레 2 686m, 석성)과 그 서부의 2.5㎞되는 지점에 있는 위나암성(전형적인 고로봉식산성) 즉 산성자산성을 포괄하였다.

국내성일대에 1만 2 000여기의 무덤이 있다.

고구려의 수도옮김은 고구려봉건국가의 중앙집권적통치체제강화에서 중요한 의의를 가지였다.

이처럼 고구려는 나라의 통치체제를 강화해나가면서 당시 동방의 대강국으로 등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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