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절 고대문화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우리 조상들은 고대로부터 찬란한 문화를 창조하였으며 동방문화를 꽃피웠습니다.》 

우리 선조들은 고대에 벌써 철학사상과 과학기술, 문학과 예술 등 문화전반에서 큰 발전을 이룩하여 동방문화를 꽃피워온 슬기로운 민족이다.

우리 나라 고대문화발전에서 선도적역할을 논것은 세계5대문화의 하나인 대동강문화였다. 대동강문화는 평양을 중심으로 한 대동강일대에서 꽃펴난 고대문화를 가리킨다.

과학기술을 비롯한 우리 나라 고대문화는 고조선의 수도가 자리잡고있던 평양, 대동강기슭에서 먼저 개척되였으며 그 성과들이 조선반도와 료하류역, 송화강류역의 넓은 지역으로 파급되여 큰 발전을 이룩하였다. 대동강류역일대는 세계적으로 가장 오랜 고대문화의 발상지의 하나이다.

△ 과학과 기술의 발전

재능있고 지혜로운 우리 선조들은 고대시기에 과학과 기술을 높은 단계에 올려세웠다.

- 우리 나라 고대의 과학기술분야에서 특출한 자리를 차지한것은 금속야금 및 가공기술이였다.

• 국가성립이전 B.C. 4000년기 후반기부터 청동합금 및 가공기술은 단군조선시기에 더욱 발전풍부화되였으며 후조선과 부여, 구려, 진국시기에 절정을 이루었다.

당시 주민들은 청동합금에서 석과 연이 노는 역할을 파악하고 동-석-연의 3원합금계에 속하는 청동합금을 얻어내였다.

단군조선시기에 해당하는 남양리유적16호집자리와 룡곡리5호 고인돌무덤에서 나온 비파형창끝들은 석의 함량이 각각 6. 2%, 6. 5% 로서 세기와 굳기, 쓸림견딜성이 매우 좋은 재료이다.

청동합금기술과 함께 그 가공기술도 발전하였다.

고대시기에 우리 선조들은 많은 종류의 청동제품을 다양한 형태와 크기로 만들었는데 이것자체가 주조기술을 비롯한 당시의 청동가공기술의 높은 발전수준을 보여준다.

질높은 주조물을 얻어내기 위하여 당시 기술자들은 여러가지 거푸집을 만들어썼다. 거푸집은 보통 곱돌로 만들거나 정밀주조에는 밀랍형주물법도 적용되였다. 그리고 생산성을 높이기 위하여 하나의 거푸집으로 여러개의 제품을 동시에 부어낼수 있는 거푸집들도 만들어내였다.

고대조선시기 강상무덤에서 나온 청동그물장식품에 쓴 구리실은 직경이 0. 25㎜정도밖에 안되는 아주 가느다란것인데 이것만보아도 세공술의 발전모습을 잘 알수 있다.

귀금속가공기술과 도금기술도 발전하였다.

우리 선조들은 순금제 귀걸이와 목걸이, 금동제 가락지와 귀걸이, 말관자, 무기류 등 여러가지 제품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수은과 금분을 혼합한 다음 그것을 순동 또는 청동제품에 바르고 열을 가하여 수은을 증발시키는 방법으로 금도금을 하는 아말감법을 창안하였을뿐아니라 B.C. 1000년기에는 석도금방법을 창안하여 널리 보급하였다. 당시 우리 선조들은 얇게 민 금박판을 동 또는 청동제품우에 입히는 판금법도 알고있었다.

• 고대조선시기에 금속야금 및 가공기술의 발전에서 특기할 사실은 제철제강기술이 개발된것이다.

B.C. 2000년기 말에 철기가 널리 보급되였다. 이것은 황해북도 황주군 고연리유적2호집자리에서 나온 쇠쪼각과 쇠슬라크가 실증해준다.

우리 나라에서 제철제강기술이 제일먼저 개척된 지역은 대동강류역일대였다. 평양을 중심으로 한 대동강류역일대의 고조선주민들은 청동합금생산과 련철, 선철생산과정에 얻은 오랜 경험과 기술에 토대하여 후조선시기에 벌써 고온야금법에 의한 강철생산을 개발해냈다.

당시 수공업기술자들은 높은 제철제강기술에 토대하여 무기와 공구, 로동도구와 마구류 등 다양한 철제품들을 생산하였으며 그 과정에 철가공기술을 발전시켜나갔다. 그들은 제품의 용도에 맞게 재질(선철, 강철)과 가공방법(단조, 주조)을 선택하였으며 일부 철제품가공에서는 열처리방법도 도입하였다.

이 시기에 펴기, 늘이기를 기본으로 하면서 단접과 같은 매우 복잡한 단조기술도 창안해냈다. 평안남도 강서군 태성리에서 드러난 쇠도끼는 도끼날부분은 굳은 탄소강, 겉과 자루맞추는 구멍부분은 저탄소강을 단접하여 만든것이였다.

이외에 평양일대의 유적들에서 나온 철제무기 및 공구류들을 통하여 제철제강기술의 발전면모를 엿볼수 있다.

- 고대시기 우리 나라에서 이룩된 주요한 과학기술적성과의 하나는 도기생산기술을 개발한것이다.

우리 선조들은 신석기시대이래의 질그릇(토기)생산기술에 토대하여 단군조선초기에 도기생산기술을 개발하여 도기를 만들어냈다. 특별한 시설이 없이 로천에서 700~800°C의 온도에서 구워내는 질그릇과는 달리 도기는 1 100~1 200°C의 밀페된 로에서 소송해낸것으로서 질그릇에 비해 질이 훨씬 높고 여러모로 우월하였다.

삼석구역 표대유적2기에 속하는 집자리에서 도기가 나왔는데 그것은 회색칠이 매우 얇으며 흡수률이 14. 1%에 이른것도 있다.

고대조선의 도기는 그 생산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점차 연질도기로부터 경질도기에로 이행하였다.

고대조선시기에는 벼재배기술과 비단생산기술이 개척된것을 비롯하여 농업, 요업, 방직 등의 기술분야에서도 큰 발전이 이룩되였다.

- 고대시기에 천문학과 기상학도 높은 수준으로 발전하였다.

평안남도 증산군 룡덕리, 평원군 원하리와 원암리, 평양시 강동군, 삼석구역, 순안구역, 황해북도 상원군을 비롯한 여러 지역의 고인돌무덤의 뚜껑돌들에 새겨진 별자리그림들은 단군조선시기 우리 나라 천문학발전의 일단을 전해주고있다. 현재까지 평양을 중심으로 한 대동강류역일대에서 알려진 4천~5천년전의 이러한 별자리그림만도 200여개나 된다.

 

 

별자리가 새겨진 고인돌

 

고대의 별자리그림들은 우리 선조들이 별과 별자리들을 도형화하여 놓을수 있을만큼 상당히 높은 수준의 천문학지식을 체득하고있었다는것을 보여준다. 그들은 북극성을 중심으로 하는 별들의 회전운동, 세차현상에 대한 일정한 표상을 가지고있었다. 특히 우리 선조들은 재기힘든 별의 밝기까지도 도형으로 변환시켜 분류할수 있을만큼 별밝기를 정량화하는데 성공하였다. 《삼국지》30권 위서 예전에는 《별의 상태를 보고 그해 농사의 흉풍을 예견하였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천문기상관측의 일단을 보여준다.

의학도 높은 수준으로 발전하였다. 우리 선조들은 일찌기 돌침료법을 발명하였으며 여러가지 식물성 및 동물성약재를 병치료에 널리 리용하였다. 중국의 오랜 책들인 《황제소문》이나 《산해경》에서는 《동방조선에 침돌이 많으며 그것이 조선에서 전해진것》이라고 강조되였다.

우리 나라의 의학은 이웃나라들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웃나라 사람들은 우리 나라를 가리켜 《죽지 않고 오래사는 나라》라고 하면서 《불사약》이나 《불로초》를 구하려고 우리 나라로 자주 드나들었다.

이 모든 사실들은 고대시기 우리 나라의 과학과 기술이 여러 분야에 걸쳐 체계화되고 크게 발전하였다는것을 뚜렷이 보여준다.

△ 고대시기 우리 말과 글의 발전

- 조선말은 조선사람들자신에 의하여 형성된 고유한 민족어이며 우리 인민의 귀중한 민족적재부이다.

옛기록들에는 고조선의 수도나 부수도를 《왕검성》 또는 《왕험성》이라고 하였는데 《왕검》은 《니무거머》(님검)이라는 소리를 옮겨놓은것이다. 결국 《왕검성》은 《임금이 있는 성》 즉 수도라는 뜻이다.

이 언어자료를 통해 알수 있는것처럼 고대조선말에서는 거센 소리, 된소리가 없고 주로 순한 소리만이 쓰이였으며 받침이 거의 쓰이지 않았다.

고대시기에 조선말은 고조선과 부여, 구려, 진국 등에서 공통적인 언어로 발전하였다. 당시의 조선말은 말소리와 어휘, 문법 등 여러 면에서 단일한 언어로서의 공통성이 뚜렷하다.

- 고대조선사람들은 단군조선초기부터 《신지글자》로 전해오는 자기의 고유한 글자를 만들어썼다.

《평양지》에는 1583년에 평양 범수교밑에서 돌비를 파냈는데 거기에 씌여진 글자가 단군때 신지가 만들어썼다는 글자일것이라는 한 기록이 있으며 《녕변지》에서는 80자의 신지글자가 있었다고 하면서 16자를 소개하였다.

신지글자는 그림글자, 모양딴글자, 부호글자와 같은 시초글자형태를 거쳐 단군조선초기에 창제된 고대글자라고 인정된다.

《평양지》와 《녕변지》를 비롯한 력사자료가 전하는 이러한 사실들은 신지글자가 고조선시기에 실지로 널리 썼으며 서사생활을 하여왔다는것을 말해준다.

이처럼 우리 민족은 반만년전부터 자기의 고유한 조선말과 첫 민족글자인 신지글자를 만들어쓰면서 찬란한 자기의 민족문화를 창조하여왔다.

△ 고대조선의 사상과 도덕

- 고대시기의 철학은 당시의 사회계급관계를 반영하여 계급적성격을 띠였으며 진보적인 조류와 반동적인 조류로 갈라져 대립되여있었다.

• 고대조선에서 최초에 발생한 철학사상은 소박한 유물론사상과 변증법사상이였다.

고대의 진보적인 사상가들은 세계의 시원을 《기》에서 찾았다. 그들은 세계는 공기나 안개와 같은 무정형적인 혼돈상태에 있는 물질적인 《기》로 이루어졌으며 그의 작용에 의하여 운동변화한다고 주장하였다.

고대조선에서 발생발전한 유물론적견해와 변증법적사상은 매우 소박하고 직관적이며 신비적인 요소도 있었으나 그것은 종교신비설에 타격을 주고 당시의 과학기술발전에 긍정적작용을 하였으며 중세유물론사상발전의 시초를 열어놓았다.

• 고대 우리 나라에서는 신흥노예주계급의 리익을 대변한 《선인》사상이 발생발전하였다.

《선인》사상은 래세에서의 영원한 삶을 설교하는 종교와 달리 《장생불사》의 《선약》을 먹거나 심신단련과 인격적수양을 통하여 현세에서의 영생을 설교하였다.

이 사상은 당시 의학, 약학의 발전에 기초하여 발생한것으로서 관념론적인 종교신비주의에 대립한 무신론적이며 현실주의적인 견해였다.

• 보수적인 노예주계급의 사상적대변자들은 고대노예제사회를 변호하고 인민들을 착취억압하기 위하여 종교적인 관념론철학을 만들어냈다.

고대관념론철학은 노예소유자들이 원시사회에서 발생한 《하늘신》숭배, 령혼숭배 등 원시종교를 저들의 계급적리익에 맞게 개작하여 체계화한 반동적인 사상이였다.

• 고대조선에는 이밖에도 령혼숭배사상, 령혼불멸설, 조상숭배사상들이 있었다.

- 고대조선에서는 사상과 함께 고상한 도덕품성도 발생발전하였다.

조선사람들은 예로부터 정의와 평화를 사랑하였으며 근면하고 화목하게 사는것을 좋아하였고 명랑한 도덕품성을 지니고있었다.

고대로부터 이루어진 우리 조상들의 고상한 도덕적품성과 아름다운 풍습은 그후 우리 인민들에 의하여 이어지면서 하나의 민족적미풍량속으로, 우리 민족의 고유한 특성으로 더욱 공고발전되였다.

△ 문학과 예술의 발전

- 문학의 발전

• 고대문학은 원시문학과는 다른 새로운 특징을 가지였다.

고대문학은 첫 계급사회의 문학으로서 계급적성격이 뚜렷하였다.

고대문학은 집단적구전문학으로만 이루어졌지만 원시문학과는 달리 사회적분업의 발전, 사회활동범위의 확대, 사람들의 의식수준의 제고 등을 반영하여 개인창작의 출현을 보게 되였으며 문학적형상수법도 다양해졌다.

• 고대조선의 문학유산으로서 전해지는것은 건국설화들인 《단군신화》《해모수신화》, 고조선의 서정가요 《공후인》이 있다.

건국설화는 신화적인 색채를 많이 띠고있다.

그것은 건국설화가 사람들이 아직 신화적사고방식에 물젖어있었던 고대초기에 창작되였다는 사정과 함께 당시 사람들이 《건국시조》들을 신처럼 우상화하려고 한 사실과 많이 관련된다.

고대시기에 서사문학이 새롭게 발생발전하였는데 오늘까지 전해지고있는 작품으로서는 고조선의 배사공인 곽리자고의 안해 려옥이 지은 서정가요《공후인》이다.

《고금주》라는 옛날책에는 《공후인》의 창작경위와 가사의 내용이 실려있다.

이 가요에는 고대사회에서 압박받고 천대받던 인민들의 불행한 처지와 비극적운명이 반영되여있으며 남의 불행과 슬픔을 자신의 슬픔으로 여기고 동정을 표시한 고조선인민들의 아름다운 정신세계가 반영되여있다.

고대문학은 원시문학의 터전우에서 고대사회의 현실에 기초하여 발생발전한것으로 하여 주제가 다양하지 못하고 현실묘사의 폭과 심도가 미숙한 유년기의 문학이였다.

그러나 고대문학은 우리 문학의 오랜 력사적전통과 우수성을 실증하고 중세문학발전의 터전을 마련한것으로하여 뚜렷한 력사적지위를 차지한다.

- 음악과 무용의 발전

• 고대문학유산의 하나로서 《가락국기》에 전해오는 집단적구전가요인 《영신가》(거부기노래)를 들수 있다.

이 노래는 가락(가야)국의 시조 수로를 맞이할 때 사람들이 산봉우리에 올라 흙을 쥐고 춤을 추면서 집단적으로 부른 노래로 알려져있다.

• 고대시기에는 악기도 발전하였다.

이 시기에는 종류는 많지 않았으나 벌써 우리 민족악기의 기본적인 종류로 되는 현악기, 관악기, 타악기 등이 있었다.

• 고대조선에서는 가무형태의 예술도 발전하였다.

당시의 가무예술에서는 농업생산활동과 결부된 의식행사에 집단적으로 모여서 노래하고 춤추는것이 위주로 되고있었다.

고조선의 《무천》, 부여의 《영고》, 진국의 《제천》행사때 남녀로소 할것없이 모두 한데 모여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는 기록은 당시 가무형태의 예술의 발전상을 보여주고있다.

이러한 고대가무는 점차 그 종교적성격을 벗어버리고 가무의 선률과 률동들이 모두 농업생산활동과 밀접히 결부된 인민창작의 요소들로 그 본바탕을 이루었는데 그후 우리 나라 전통적민속놀이의 하나인 농경두레놀이와 결부되여 예술적으로 더욱 발전하면서 마침내 우리 나라 농악예술전통을 이루었다.

- 미술의 발전

고대 우리 선조들은 원시시대에 이룩된 조형예술의 성과와 경험을 계승하여 새로운 높은 수준의 미술을 창조하였다.

고대미술의 발전면모는 공예에서 뚜렷이 찾아볼수 있다.

고대조선인민들이 만든 공예제품으로서 오늘까지 남아있는 유물은 금속공예품과 구슬공예품이다.

• 고대조선의 금속공예품에서 대표적인것은 대동강문화의 청동단검과 청동창이다. 그것은 물론 무기였지만 동시에 고대조선사람들의 기질에 맞는 독특하고 고유한 형태를 가진 하나의 공예품이다.

단군조선시기에 쓰인 비파형단검은 칼날의 륜곽이 옛날 악기인 비파를 련상시키게 한데서 그렇게 이름지은것인데 날부분과 검자루, 검자루맞추개 등으로 일식을 이루면서 그것을 조립할수 있게 된 독특한 짜임새를 가지였다.

고조선후기에 쓰인 좁은놋단검은 따로따로 조립하게 되여있다는 점에서 비파형단검과 비슷하나 자름면이 복잡한 다각형으로 된 등대와 그 좌우에 피홈을 내고 다시 검몸의 가운데부분이 약간 들어간 매듭을 가지고있는것 등 자기의 고유한 특징을 가지고있다.

• 고대조선의 금속공예술은 황해북도 상원군 장리 1호고인돌무덤과 강상무덤 등에서 나온 청동2인교예장식품, 그물장식품, 방울, 구슬 등에서 찾아볼수 있다.

이와 같이 고대조선의 공예품은 어느것이나 다 고유하고 독특한 형태와 무늬를 가지고있음으로 하여 우리 나라 고대미술의 우수성과 독창성을 뚜렷이 보여준다.

△ 고대 우리 선조들의 일본렬도에로의 진출

우리 선조들은 벌써 신석기시대의 이른 시기부터 먼 바다를 정복하고 일본땅에 진출하여 개척자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일본의 문화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

 

 

- 우리 나라 고대국가 주민들가운데서 특히 일본에 적극 진출한것은 지리적으로 가까운 거리에 있었던 진국사람들이였다.

고대시기 우리 선조들이 일본에 진출한 사실은 일본 야요이문화의 조선적성격을 통해서도 잘 알수 있다.

일본력사에서 《야요이문화》라고 한것은 B.C. 4~A.D. 3세기경에 일본의 북규슈일대에 갑자기 나타나 점차 동쪽으로 파급되여간 발전된 금속문화, 농경문화를 가리킨다.

야요이문화는 A.D. 3세기까지 약 600년간 계속되였다.

야요이문화이전 일본은 《죠몽문화》라고 불리우는 신석기시대문화에 해당하는 낮은 단계에 머물러있었다.

이 시기 일본의 원주민들은 농사와 금속에 대해 알지 못하고 나무열매따기, 짐승사냥, 물고기잡이 등 채집경제에 주로 종사하였다.

야요이문화는 그 이전 일본의 죠몽문화와 발전단계상으로 보나 문화갖춤새로 보아 줄이 잇닿지 않는 반면에 고대조선문화, 구체적으로 진국의 문화와 강한 공통성을 띠고있다.

- 일본렬도에로 진출한 우리 선조들은 발전된 농경문화를 보급하였다.

일찍부터 농업을 기본생업으로 삼고있던 고대조선사람들은 일본땅에 건너가서도 농사를 지으면서 아직 농업을 모르던 일본의 원주민들에게 농사짓는 방법을 배워주었다.

 

 

그것은 북규슈일대의 유적들에서 드러난 벼알과 석기들이 진국의것과 같다는 사실, 그리고 벼농사유적의 대부분이 진국에 가장 가까운 현해탄연안지방에 분포되여있다는 사실을 통하여 잘 알수 있다.

일본렬도에로 진출한 우리 선조들은 당시 금속을 모르고있던 그곳 주민들에게 금속문화도 보급하였다.

그것은 고인돌무덤, 돌관무덤, 독무덤, 움무덤 등과 거기서 나온 유물들을 통해 잘 알수 있다.

이 모든 사실들은 《일본의 려명》이라고 하는 야요이문화의 기원이 우리 나라이며 그의 창조자도 바로 우리의 고대주민들이였다는것을 명백히 보여주고있다.

내리적재 하시겠습니까?
CAPTCHA Image
가+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