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절 부여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조선민족은 한피줄을 이어받으면서 하나의 문화와 하나의 언어를 가지고 몇천년동안 한강토우에서 살아온 단일민족입니다.》 

부여국은 구려, 진국 등과 함께 고조선에서 분립하여 독자적인 나라로 등장한 우리 나라 고대국가의 하나였다.

부여국의 주민역시 조선옛류형사람들의 후손들이였다.

길림지방의 부여사람들은 단군조선강성기에 고조선에 통합되여 하나의 후국을 이루고있었다. 시라, 고례 등과 함께 동부여, 북부여가 단군이 다스리는 지역이였다고 한 《제왕운기》의 기사는 그 일단을 시사해준다.

눈강류역을 비롯한 그밖의 지방들에도 부여계통의 사람들이 살고있었는데 이들도 단군조선의 영향밑에 탁리국과 같은 소국들을 이루고살았다.

△ 부여국의 성립과 령역

- 부여국의 성립

단군조선의 한 후국으로 있던 길림지방의 부여사람들은 전조선(단군조선)이 무너지고 후조선왕조가 출현하던 B.C. 15세기 중엽에 복잡한 정세를 리용하여 고조선으로부터 떨어져나와 고조선령역밖에 남아있던 부여계통주민지역들에 대한 통합사업을 다그쳐나갔다. 이것이 후세의 력사기록에 남은 《예》국이였다.

바로 이무렵에 북쪽의 탁리국에서 한 세력이 길림지방으로 남하하였다. 이들은 고조선에서 떨어져나온 후국세력인 예국과 융합되여 하나의 강력한 정치세력을 이루고 송화강류역과 눈강일대에서의 통합사업을 적극화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고대부여국이 출현하였다.

《론형》등에 실려있는 부여건국전설은 이러한 건국과정의 일단을 전해주고있다.

《부여》라는 국호는 《빌(부리)》이라는 뜻에서 유래한것이라고 인정되고있다.

《삼국지》 부여전에는 부여땅이 고대조선족의 거주지역가운데서 가장 평평한곳이라고 강조한 기사가 실려있고 또 실지로 부여국이 자리잡고있던 오늘의 길림, 장춘일대를 중심으로 한 송화강류역은 아주 넓은 벌방지대이다.

부여국은 노예제가 지배하는 고대국가였다.

원래 고대부여국의 모체였다고 볼수 있는 단군조선이 노예소유자국가였고 고조선에서 분립된 부여후국세력인 《예》국과 융합된 탁리국 역시 노예제가 지배하는 고대소국의 하나였다.

부여에는 순장제도가 지배하였다. 《후한서》부여전에 의하면 부여귀족들가운데는 단번에 100여명씩 순장을 하는자들이 있었다.

부여국의 건국시기는 B.C. 15세기 중엽이였다.

- 부여국의 령역

 

  

 

부여국 령역도

 

고대부여국의 령역:

서쪽- 서료하중류, 북쪽- 눈강중류, 동류송화강북쪽일대, 동쪽- 우쑤리강, 남쪽- 휘발하상류로부터 함경북도 해안지대에 이르는 계선

부여국의 서남쪽, 남쪽에는 고조선(후조선)과 구려국이 자리잡고있었다.

부여는 송화강류역을 중심으로 하여 넓은 판도를 차지하고있었다.

그것은 부여와 이웃하였던 나라 및 종족들의 형편을 전하는 자료들과 유적분포상태를 통하여 알수 있다.

부여의 서변은 서료하중류지역으로부터 북쪽으로 대흥안령산줄기에 이르는 계선이였다. 부여는 서쪽으로 오환과 접하고있었는데 부여의 고유한 문화인 한서2기문화 및 서단산문화와 서쪽의 유목종족의 문화가 대체로 이 계선에서 뚜렷이 구분된다.

부여의 북변은 눈강중류로부터 동쪽으로 흐르는 송화강중류에 이르는 계선이였다. 부여의 문화인 백금보문화분포의 북쪽한계는 눈강중류의 앙앙계로부터 동쪽으로 흐르는 송화강류역의 장광재령부근에 미치고있다.

부여의 동변은 목단강계선이였다.

부여는 동쪽으로 읍루와 접하였는데 부여와 가까운 지역의 읍루문화인 앵가령웃층문화의 분포범위는 대체로 목단강중하류일대에 미친다.

부여의 남변은 서남쪽의 혼하상류로부터 두도강상류지역을 거쳐 동남쪽으로 두만강중류 및 목릉하중류에 이르는 계선이였다. 그런데 부여는 일정한 기간 북옥저를 지배하였다고 볼수 있으므로 부여의 동남변은 북옥저의 동변인 함경북도 해안지대까지 미치였다고 인정된다.

부여국의 중심지, 수도: 길림시교외의 동단산일대.

부여의 중심지는 길림지방이였다.

길림은 고대시기의 유적유물들이 집중되여있는곳의 하나이다. 

부여문화인 서단산문화유적은 현재까지 120여개 드러났는데 그중 58개가 길림시내와 교외에 집중되여있으며 또 길림시 동쪽교외 동단산일대에는 부여왕성유지로 인정되는 세개의 성(외성, 중성, 내성)이 있고 그 주변에 집자리와 무덤떼가 널려져있다.

길림시교외의 동단산일대에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 쌓은 3개의 고대성벽이 있고 그 동남쪽에 남성자성이 잇달려있다. 이 남성자성은 궁전이 자리잡고있던 부여의 왕궁으로 인정되고있다. 

성의 동남쪽에는 궁성터로 볼수 있는 남성자성이 잇달려있는데 주위가 1 050m의 원형성이며 성주위에 해자자리가 있고 성안에 관청 혹은 궁전터로 보이는 길이 73m되는 장방형의 집터가 드러났다.

부여문화가 가장 집중적으로 배치된 지역이 길림지방이며 또 그 곳에 왕성터로 인정할만한 유적이 있으므로 부여의 중심지는 길림지방이라고 볼수 있다.

△ 부여국의 통치체제, 경제의 발전

- 통치체제

부여국은 극소수 노예주계급의 독재를 실현하기 위한 권력기관 즉 노예주계급의 리익을 옹호하는 폭압적인 통치체제가 꾸려져있었다.

부여의 왕은 정치적지배권을 거머쥔 최고의 권력자, 지배자였다. 왕의 자리는 기본적으로 세습제에 의하여 계승되였다. 그러나 부여에서 왕의 권력은 귀족민주주의적합의기구에 의하여 일정한 제약을 받았다.

부여에는 착취계급이 노예를 비롯한 인민대중을 가혹하게 억압착취하기 위하여 만들어낸 중앙 및 지방통치기구, 군대, 법, 감옥과 같은 반인민적이며 관료적인 통치제도가 갖추어져있었다.

• 중앙통치기구

왕밑에는 최고관료로서 상이 있었다. 상은 관료의 수반으로서 국가사업전반을 총괄하였고 국왕의 통치를 보좌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부여의 중앙관직에는 마가, 우가, 저가, 구가가 있었다. 이 가들은 중앙의 제일 높은급의 관리들이였으며 대체로 왕족출신귀족들이 오를수 있었다. 마가, 우가, 저가, 구가 밑에는 중앙관직으로서 대사, 대사자, 사자 등이 있었다.

부여에서 중요한 정치문제들 즉 형벌, 왕위계승문제, 정책수립, 법률제정, 전쟁과 대외관계 등 여러 문제들은 제가평의회에서 토의결정되였다.

제가평의회에는 통치계급의 상층인 대가들과 함께 지방의 읍락들을 다스린 가들이 참가하였다. 제가평의회는 본질상 지배계급의 리익을 철저히 옹호하기 위한 귀족민주주의합의기구였다. 제가평의회는 소수의 특권층인 가들의 리익을 철저히 옹호하기 위한 도구였으며 피지배계급인민들을보다 《효과적으로》 착취하고 억압하기 위한 독재기구였다.

귀족민주주의제도에는 왕의 전횡을 제한하는 측면도 있었으나 그보다도 왕의 통치를 보좌하는 측면이 더 강하였다. 귀족민주주의제도는 왕이 극소수의 통치계급의 리익을 더욱 철저히 대변할수 있도록 함으로써 귀족들에 대한 민주주의, 피압박인민대중에 대한 독재를 강화할수 있게 하였다.

• 지방통치기구

부여에서는 전국에 대한 지배를 강화하기 위하여 온 나라를 5개 지역으로 나누어 통치하였다. 옛 기록에 의하면 부여에서는 여러 가들이 4개 방향으로 나가 여러 읍락들을 다스렸다고 하는데 이것은 여러 가들이 관할한 4개의 지방행정단위를 말한것이다.

수도를 중심으로 한 나라의 중심부는 국왕이 직접 다스렸고 그밖의 4개 지역은 대가들이 다스렸다.

5개 지역으로 구분된 행정구역밀에는 크고작은 읍락들이 있었다. 읍락들가운데서 가장 큰것은 수천호, 작은것은 수백호였으며 큰 읍락은 그밑의 작은 읍락을 관할하였다.

• 법과 상비무력

부여에는 강력한 군대가 있었다.

일찍부터 목축업을 발전시키고 사냥을 자주 하였던 부여사람들은 어렸을 때부터 말타기와 활쏘기를 즐겨하였으며 일상적으로 체력을 단련하여 몸집이 크며 성격이 굳세고 용감한 체질과 기질을 가지였다.

이러한 사람들로 꾸려진 부여의 군대는 전투력이 매우 강하였으며 비교적 정연한 군사지휘체계와 병역제도가 세워져있었다.

군대의 최고지휘권은 왕에게 있었다.

국왕밑에 여러 가들이 거느린 전투부대가 있었는데 그 기본전투성원은 민과 호민으로 꾸려졌다. 이들은 자체로 무장을 갖출수 있는 경제력을 가진 층들로서 집집마다 여러가지 병쟁기를 갖추고있다가 전쟁이 일어나면 자체로 무장을 하고 전투대오에 편입되여 싸웠다.

군대에는 적과 직접 싸우는 기본전투부대밖에 노예적처지에 있던 하호층으로 이루어진 군량을 운반하는 후방부대가 있었다.

전투부대는 기병과 보병으로 구성되였는데 오랜 목축업의 전통을 가졌고 좋은 말의 산지로 알려진 부여에서는 주변의 다른 나라들에 비하여 병종구성에서 기병의 비중이 높았다.

부여에는 노예제적질서를 유지공고화하기 위한 가혹한 법률이 있었다. 법은 단편적으로 전해지고있는데 그에 의하면 사람을 죽인 자는 죽이고 그 가족을 노비로 만들며 남의 물건을 훔친 자는 훔친 물건의 12배에 달하는 량을 배상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 법조항들은 부여사회의 계급적대립을 집중적으로 반영하고있으며 노예소유자계급의 리익을 전적으로 대변하고있다. 살인자의 가족을 노비로 만든다고 한것은 주로 노예소유자들의 생명을 보호하고 그들의 계급적지배를 안받침하며 노예원천의 제공을 위한것이였고 남의 물건을 훔친 경우 12배의 배상을 해야 한다고 한것은 가혹한 배상액으로 지배계급을 반대하는 인민들의 투쟁을 억제하며 배상능력이 없는 자들을 형벌에 의해 노예로 전락시키기 위하여 설정한것이였다.

부여에는 또한 《범죄자》들을 잡아가두기 위한 감옥이 있었다. 감옥은 수도뿐아니라 전국각지에 있었는데 여기에는 법의 제재대상으로 되였던 《죄인》들이 감금되였다. 그 가운데서 가장 중한 《범죄자》들은 영고(국중대회)를 계기로 여러 가들의 《합의》에 따라 처형되였다.

- 경제의 발전

부여에서는 노예를 비롯한 근로인민대중의 창조적인 로력투쟁에 의하여 일찍부터 경제의 여러 부문들이 발전하였다.

단군조선의 후국시기부터 청동기문화의 오랜 력사를 가지고있었던 근면한 부여사람들은 철을 생산하여 공구와 농구, 무기류 등 여러가지 철기를 만들어썼다.

철생산의 광범한 보급은 생산도구를 전반적으로 예리하고 쓸모있는것으로 갱신하게 함으로써 로동생산능률을 높이고 생산력을 가일층 발전시키였다.

• 농업과 목축업의 발전

부여에서 기본생산부문을 이룬것은 농업이였다.

농업은 부여의 중심지대인 송화강류역에서 특히 발전하였다. 이 지역은 넓은 벌방지대였고 땅이 기름져서 농사에 매우 유리하였다.

농업에서는 수수, 조, 콩, 기장, 피, 보리, 팥 등 여러가지 밭곡식의 재배가 기본이였다.

농업과 함께 목축업도 발전하였다. 목축업의 오랜 전통을 가지고있던 부여사람들은 언덕과 초원, 넓은 늪이 많은 유리한 지대들을 리용하여 목축업을 발전시켰다.

그리하여 부여는 이웃나라들에 집짐승을 잘 기르는 나라로 널리 알려졌다.

목축업은 눈강과 동쪽으로 흐르는 송화강류역일대에서 특히 발전하였다. 규모가 큰 방목과 함께 매개 농가들에서 부업으로 진행하는 집짐승기르기도 많이하여 여러가지 집짐승들을 길렀다.

집짐승들가운데서 대표적인것은 말, 소, 돼지, 개, 닭, 양 등이였다. 이가운데서 부여사람들이 많이 기른 집짐승은 돼지와 말이였다. 특히 부여의 말은 명마로 이웃나라들에 널리 알려져있었다.

부여에서는 사냥도 많이 하였다. 사냥은 사람들에게 질좋은 여러가지 모피와 맛 좋은 고기, 귀한 약재 등을 제공해줌으로써 그들의 생활에 도움으로 되였다.

• 수공업의 발전

수공업에서 대표적인 부문은 야금, 직조. 모피가공, 옥돌가공 등이였다. 야금업은 주로 청동주조업과 제철업이였다.

청동주조업은 끊임없이 발전하면서 높은 수준에 이르렀다. 그 종류를 보면 단검, 창끝, 활촉 등의 무기류와 도끼, 끌, 칼, 송곳, 낚시 등의 로동도구와 거울, 바늘, 방울 등 생활용품 그리고 단추, 패물, 팔지, 가락지, 련달린 구슬모양의 장식 등 치레거리가 있었다.

청동주조기술과 함께 합금기술도 발전하였다.

부여에서는 제철기술이 보급되면서 철기문화가 새롭게 발전하였다.

철기들로는 도끼, 자귀, 괭이, 끌, 송곳, 낫 등의 도구들과 칼, 창, 활촉, 갑옷 등의 무기, 무장류가 있는데 그 형태나 재질에 있어서 고대조선의 다른 지역의것보다 못하지 않았다.

또한 직조업이 발전하였다. 부여사람들은 가는실을 낳아 베틀에 메워 발이 고운 천을 짜냈으며 민간에서 실낳이와 천짜기가 널리 진행되였다.

모피가공기술도 발전하였다. 부여에서는 여러가지 산짐승과 집짐승 가죽이 흔하였으며 그것을 잘 가공하여 여러모로 리용하였다.

또한 금, 은 세공과 구슬가공이 발전하였다. 부여는 황금의 산지로 널리 알려졌고 고운 옥돌, 여러가지 구슬이 많이 생산되였다.

농업, 목축업, 수공업의 발전에 따라 국내외상업도 발전하였다.

부여에서 생산된 여러가지 모피류들, 좋은 말과 구슬류 같은 특산물들이 이웃나라들에 널리 알려져있은것은 부여의 대외무역이 성행하였던 사정과 많이 관련된다.

- 사회계급관계

부여의 지배적인 경리형태는 노예소유자적경리형태였다. 한명의 노예주가 수백명의 노예들을 거느리고 운영한 대규모경리도 있었다.

최대의 노예주는 국왕이였으며 그밖의 마가, 우가, 저가, 구가를 비롯한 대가들과 그밑의 소가들을 포괄하는 여러 가들은 크고작은 노예주들이였다.

노예는 포로노예, 채무노예와 함께 형벌노예들이 있었다. 이들은 농업과 목축업, 수공업, 상업 등 모든 부문에서 노예로동을 강요당하였다.

부여에는 일정한 량의 토지와 그밖의 생산수단을 가지고 자체의 힘으로 경리를 운영하는 자영소농민경리도 있었다.

이 경리의 담당자는 어제날의 공동체성원으로서 공동체가 해체된 이후도 이미 차지하고있던 공동체의 토지를 그대로 유지해온 계층들이였는데 봉건화과정이 진행되면서 이들은 적지 않게 봉건적농민으로 되였다.

부여에는 부분적으로나마 지난 사회의 유제로서 공동체적경리형태도 남아있었다.

△ 부여국의 종말

B.C. 3세기경에 이르러 부여국안에서는 사회계급적모순이 첨예화되면서 국력이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자주성을 위한 인민들의 투쟁에 의하여 노예소유자경리가 위기에 직면하게 되고 이에 대립하여 봉건적인 관계가 새로 자라나게 된것과 관련되였다.

부여말기에 새 봉건관계의 확대강화에 리해관계를 가지게 된 신흥봉건세력이 대두하게 되였으며 노예를 비롯한 인민대중은 노예제도를 반대하는 투쟁을 더욱 강화하였다.

그러나 낡은 노예제적경리의 유지에 매달리고있던 노예소유자들은 봉건적요소의 발생, 발전을 억제하였으며 따라서 지배계급안에서는 알륵과 분쟁이 격화되였고 사회계급적모순은 증대되였다.

부여가 약화되여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하던 B.C. 3세기에 그 남쪽에서는 봉건국가 고구려가 새로운 세력으로 자라나기 시작하였다.

처음에 부여는 새로 건국된 같은 겨레의 나라인 고구려와의 관계를 좋게 발전시켰다. 그후 고구려가 주변의 소국들을 통합하면서 국력을 키워나가자 부여의 통치배들은 고구려의 세력이 더 커지기전에 그 왕실을 저들에게 예속시킴으로써 고구려로부터의 위험을 제거하려고 하였다.

이로부터 부여는 볼모교환과 같은 평화적인 외교적방법으로 고구려왕실을 위협하는 한편 상대적으로 많은 군사력에 의거하여 전쟁의 방법으로 고구려를 굴복시켜보려고 시도하였다.

당시 고구려는 아직 부여와 싸울만한 힘이 부족하였으므로 부여와의 정면충돌을 될수록 피하면서 그 관계를 신축성있게 조절하였다.

그후 고구려의 세력이 급속히 강화됨에 따라 두 나라사이의 력량관계에서는 점차 변화가 일어나게 되였다.

부여의 통치배들은 고구려의 군사력이 강화되여 현저히 우세해진것을 느끼게 되자 고구려왕실을 굴복시키려던 초기의 기도를 실현할수 없게 되였으며 오히려 고구려와의 관계에서 피동에 빠지게 되였다.

두 나라사이의 력량관계가 점차 부여에는 불리하게, 고구려에는 유리하게 전변되여가고있던 시기에 고구려는 부여로부터의 위협과 압력을 제거하고 그 지역을 통합하기 위한 준비를 적극적으로 다그쳐 마침내 부여에 대한 대규모적인 공격을 개시하였다.

고구려군은 B.C. 219년 2월에 부여의 남쪽계선에 이르렀고 이에 대항하여 부여는 전국의 군사들을 총동원하였다.

그리하여 부여의 남쪽 진펄지대에서 두 나라 군대사이에 큰 싸움이 벌어졌다. 전쟁초기 부여의 주력군은 고구려군을 기습하였으나 고구려군의 전술에 걸려 진펄에 빠지게 되여 오히려 고구려군의 역습을 받게 되였다.

결국 이 싸움에서 수많은 부여군사들과 함께 부여왕 대소가 전사하였다. 부여군은 큰 손실을 입었으나 인차 사태를 수습하고 고구려군을 여러겹으로 포위공격하여 고구려군을 물리쳤다.

하지만 부여는 국왕과 많은 군사들을 잃어버렸으며 이것은 부여국에 엄중한 후과를 미치였다.

부여왕의 죽음을 계기로 통치층안에서는 불안과 동요가 일어났으며 고구려에 넘어가는자들이 늘어났다.

대소왕이 죽자 그의 아우는 B.C. 219년 4월에 추종하는자 100여명을 데리고 갈사수가에 이르러 갈사국이라는 나라를 세웠고 그에 뒤이어 같은해 7월에 대소왕의 사촌아우가 1만여명의 주민을 거느리고 고구려에 투항하였다.

부여귀족관료들의 련속적인 배반과 분렬은 이미 부여국가의 통치집단이 사분오렬되여 수습할수 없게 되였다는것을 보여주는것이였다.

결국 고대부여국은 B.C. 219년 고구려와의 전쟁후 얼마안되여 멸망하였다.

 

△ 복습문제

- 부여국 주민들은 누구의 후손인가? 

- 부여국에 법이 있었다는 대표적인 력사문헌에는 어떤것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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