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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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편 조선봉건사회
제1장 첫 봉건국가들의 성립과 발전
제4절 수, 당침략자들을 물리친 고구려인민들의 투쟁
1. 수나라침략자들을 쳐물리친 고구려인민들의 투쟁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우리 인민은 예로부터 외래침략자들을 반대하여 용감하게 투쟁하여온 자랑찬 력사를 가지고있습니다.》

581년에 성립되여 589년 전국을 통일한 수(隋)나라는 저들의 《강대성》을 믿고 598~614년간에 4차례나 고구려에 침입하였으나 그때마다 수치스러운 참패를 당하였다.

 

 

 

 

△ 제1차 고구려-수전쟁(598년 전쟁)

― 적의 침략전쟁준비

6세기 말에 들어서면서 고구려의 대내외정세는 매우 긴장하였다.

수나라통치배들은 저들의 《강대성》을 믿고 주변의 여러 나라들을 정복하기 위한 침략전쟁을 끊임없이 벌리였으며 고구려에 대해서도 위협공갈하는 한편 국경일대에 많은 군대를 집결시키면서 침략준비를 서둘렀다.

수나라 양견(문제)은 고구려에 편지를 보내여 외교적압력을 가하여왔다. 양견은 편지에서 자기의 《신하》가 되라느니 한명의 장수로서 고구려를 능히 정복할수 있다느니 하면서 고구려를 위협공갈하였다.

수나라침략자들은 또한《자기네가 말갈을 내몰고 거란을 금지하였다, 고구려가 재물로 수나라의 노수(쇠뇌만드는 기술자)를 매수하고 사신을 연금하였으며 기마병을 자주 보내여 변방을 친다.》는 구실을 내걸면서 고구려에 대한 침략준비를 더욱 로골적으로 다그쳤으며 고구려의 서쪽 국경대안인 영주(조양부근)에 많은 침략무력을 집중시켜놓고 고구려를 무력으로 위협하였다.

― 고구려의 대응조치

수나라가 고구려의 서쪽에서 새로운 침략세력으로 등장하자 고구려는 나라의 방위를 강화하기 위한 대책을 세우지 않을수 없었다. 고구려는 586년에 새로 건설한 평양성(장안성)으로 수도를 옮긴 후 병기를 정비보충하고 군량을 저축하는 등 수도와 나라의 방위를 위한 적극적인 대책을 세웠다.

이와 함께 군사훈련, 군량준비, 방어시설구축 등 적들의 침공에 대처할수 있는 만단의 준비를 갖추는 한편 적들에게 침략기도를 버릴것을 경고하기도 하였다.

 ― 적들의 침략전쟁도발과 그 섬멸

598년 1월에는 고구려의 영양왕이 직접 1만여명의 기병으로 수나라침략군의 전초기지로도 되여있던 영주를 들이쳐 침략자들에게 강한 타격을 주었다. 이것은 자위적인 정당한 조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나라통치배들은 이것을 구실로 삼아 그해 6월에 한왕 량과 왕세적을 우두머리로 하는 100만(후방부대 포함)의 대군을 내몰아 바다와 륙지로 고구려를 침공하였다.

고구려군은 전초기지인 무려라성을 비롯한 대릉하계선, 의무려산계선에서 적들에게 섬멸적타격을 안기였으며 료하방면에서도 침략무력을 료하계선에서 완전히 좌절봉쇄시켰다. 시간이 갈수록 적의 인적, 물적손실은 더욱 증대되였으며 게다가 적들은 장마철, 식량, 전염병 등으로 굶어죽고 병들어 죽었다.

주라후가 이끈 적수군 역시 산동반도의 동래를 떠나 바다를 건너오는 도중 풍랑으로 배가 파손되고 침몰되여 거의다 녹아났다.

수나라는 이 전쟁에서 병역의 10분의 8~9를 잃었다. 그것은 살아돌아간 적들이 《죽은자가 십중팔구였다.》고 인정한 사실에서도 알수 있다. 이것은 고구려가 수나라침략자들에게 안긴 첫번째의 강한 타격이였다.

제1차 고구려-수전쟁은 고구려인민들로 하여금 침략자들을 능히 때려부시고 승리할수 있다는 신심과 풍부한 전투경험을 쌓게 하였고 침략자들에게는 까닭없는 전쟁을 일으켜서는 안된다는 심각한 교훈을 찾을수 있게 하였다.

△ 제2차 고구려-수전쟁(612년 전쟁)

 ― 적들의 대규모적인 침략전쟁도발

• 수나라의 전쟁준비

10여년간에 걸쳐 침략전쟁준비를 다그쳐온 양제는 전국에서 긁어모은 군대와 전쟁물자들을 탁군(오늘의 베이징부근)에 집결시킨 다음 612년 1월 또다시 고구려에 대한 침략을 개시하였다.

607년 수양제는 돌궐에 갔다가 고구려사신을 만나 고구려왕이 수나라에 와서 만나지 않으면 래년에 치겠다고 위협하면서 침략전쟁기도를 로골적으로 드러내놓았다.

수나라는 610년에 들어서면서 전쟁준비를 본격화하였다.

전국의 부자들에게 돈을 내여 군마, 병쟁기를 마련하여 바치게 하였고 산동반도에 300척의 배를 건조하게 하였으며 병쟁기는 양제가 직접 검열하면서 준비시켰다.

그리하여 수나라의 전 지역이 전쟁준비의 소용돌이속에 말려들었는데 당시 군마 1필값은 10만전으로 뛰여올랐다.

산동반도에서 배를 건조하는 사람들은 물속에서 나오지 못하게 하여 허리에 구데기가 쓸고 죽은 사람이 10명중 3~4명이나 되였다.

611년에는 전국의 군사를 탁군에 모이게 하고 수양제가 직접 탁군에서 훈련을 지휘하였다.

• 612년 1월 전쟁의 도발

수나라침략군의 륙군은 113만 3 800명이였는데  좌우 각각 12개군단과 황제친영군 6개군단을 합하여 무려 30개군단이나 되였다. 그리고 후방보장인원인 수송부대인원은 전투부대의 2배 즉 200여만이였다.

이렇게 수나라침략군의 륙군만 하여도 300만에 달하였다. 그리하여 침략군의 첫 부대가 탁군에서 출발한 후 마지막부대가 그곳을 떠날 때까지 무려 40여일이 걸렸으며 그 행군대렬의 길이는 1 040리나 되였다고 한다.

적의 수군은 래호아, 주법상의 지휘밑에 300여척의 함선에 갈라타고 침입하였다.

침략군의 괴수는  수양제였다.

침략군은 수륙병진, 속전속결전술로 고구려를 단숨에 타고앉으려고 하였다.

― 고구려의 항전대책

고구려인민들은 조금도 놀라지 않고 자신만만한 기세로 수나라침략군을 물리치기 위한 반침략전쟁에 한결같이 떨쳐나섰다.

고구려는 자기의 전선사령부를  봉황성(북평양)에 두고 료하류역방어를 튼튼히 하는것과 함께 적의 속전속결, 수륙병진을 파탄시키는것을 자기의 전략으로 내세웠다.

고구려군의 총 지휘자는 을지문덕(乙支文德)이였다.

 

 

 을지문덕(상상화)

 

― 전투과정

• 무려라 통정진전투

수나라침략군과의 첫 전투는 612년 3월 무려라에서 벌어졌다.

나라의 서쪽 국경전초기지인 무려라성을 지키던 고구려군은 수나라침략군의 선두부대에 된타격을 안기고 기본방어선인 료하동쪽으로 철수하였다.

전투는 료하계선에서 치렬하게 벌어졌는데 고구려군은 높은 언덕에 의거하여 활과 노로 집중사격을 퍼붓고 민활한 기습전을 벌려 적들에게 무리죽음을 안기였다.

적들은 3월부터 시작하여 한달이라는 기일이 걸려서야 겨우 료하를 건늘수 있었는데 이 도하작전에서 소위 이름있다는 선봉장 좌둔위대장군 맥철장을 비롯한 장수 3명과 30만이상의 막대한 병력을 잃었다.

• 료동성전투(오늘의 료양)

료하계선에서 적들에게 심대한 타격을 준 고구려군은 수적차이에서 오는 불리한 정황에서 방어에 유리한 새로운 진지로 신속히 이동하였다. 그리하여 고구려의 방어중심은 4월 중순부터 료동지방에 미리부터 쌓은 견고한 성들인  료동성, 건안성,  백암성, 신성 등지에로 옮겨지게 되였다.

고구려군은 이러한 성들에 튼튼히 의거하여 적들에게 련속적인 타격을 가하였다. 그 가운데서도 료동성전투가 유명하였다.

료동성은 고구려의 서쪽 국경을 지키는 성들가운데서 그 위치로 보나 크기로 보아 적아간에 전략적의의를 가지는 곳이였다.

수적으로 우세한 적들은 수양제의 직접적인 지휘밑에 료동성을 여러겹으로 둘로싸고 여러가지 공격무기를 쓰면서 악착스럽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료동성안의 전체 고구려군민은 하나와 같이 굳게 뭉치여 4~7월까지 100여일간이나 성을 끄떡없이 지켜냈다.

료동성의 성과적방어는 고구려로 하여금 전쟁의 주도권을 튼튼히 틀어쥐고 적들의 《속전속결》작전을 파탄시켜 정세를 고구려에 유리하게 전변시켰으며 전쟁의 최후승리를 마련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리하여 전선은 료동계선에 고착되고 전쟁의 운명은 사실상 결정된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 봉황성전투, 살수대첩(薩水大捷)

《속전속결》전술이 파탄되여 참패를 거듭하자 양제는 륙군의 《정예부대》로 자처하는 9군단의 병력 30만 5천명으로 별동대를 조직하여 전선을 우회시켜 고구려의 종심깊이 침입시키려고 하였다. 이를 협동하기 위하여 적수군이 산동반도에서 출동하였다. 양제는 이렇게 함으로써 전선이 고착된 국면을 타개하고 출로를 마련하여 《수륙병진》작전으로 평양성을 강점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적들은 이르는곳마다에서 고구려군민들에 의하여 패배를 거듭하자 평양성강점을 포기하고 륙군과 수군이 합세하여 당시 고구려의 전선사령부가 자리잡고있던 북평양(봉황성)이라도 강점해보려고 하였다.

그러나 고구려군은 봉황성전투에서도 주도권을 틀어쥐고 적들에게 섬멸적타격을 안기였다.

수백척의 전함에 침략군을 싣고 바다를 건너온 수군의 우두머리 래호아는 큰 저항도 받지 않고 압록강의 지류인 애하를 거슬러 올라와 봉황성밖 60리 지점까지 기여들었지만 적륙군은 압록수(태자하)도 건느지 못한 상태에 있었다.

이때 봉황성을 방위하던 고구려군은 수적우세를 믿고 달려드는 적수군을 좁은곳에 몰아넣고 소탕해버릴 계책밑에 적들을 봉황성 라성(외성)까지 끌어들였다.

고구려군의 큰 저항을 받음이 없이 4만의 병력으로 단독공격하여 봉황성에 기여든 적들은 그때까지도 유인전술에 걸려든것을 모르고 이기는줄만 알았다. 적들은 성안에 들어서자마자 침략군의 본성그대로 뿔뿔이 흩어져 재물을 략탈하는데 피눈이 되였다.

미리부터 곳곳에 매복하여 적들의 동태를 지켜보면서 기회를 노리고있던 고구려군대는 불의의 기습으로 일대 섬멸전을 벌리였다.

고구려군의 강력한 공격을 받은 적수군은 대오를 수습할 사이도 없이 갈팡질팡하다가 무리죽음을 당하였다. 삽시에 벌어진 이 전투에서 살아 도망친자는 4만명중 겨우 수천명에 불과하였다.

한편 수양제가 마지막기대를 걸고 내몬 적의 별동대 9개군단은 고구려군에게 련속 얻어맞으면서도 전선을 돌파해보려고 압록수(태자하)에 밀려오고있었다.

적의 《정예부대》가 7월 초 압록수에 이르렀을 때 을지문덕은 담판을 구실로 적진에 들어가 적의 내부실정을 정찰하고 약점을 확인하고 돌아왔다. 이에 기초하여 적을 유인하여 완전히 섬멸할 작전계획을 수립(유인전술, 청야수성전술)하였다.

고구려군은 적들에게 련속 타격을 안기기도 하고 패하는척 하면서 적을 평양성(북평양성) 수십리지점까지 유인하였다. 고구려군의 빈틈없는  《청야수성전술》로 하여 적들은 극심한 식량난에 부닥쳐 헤여날수 없는 곤경에 빠지게 되였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고구려군은 오골성에서 적들의 후방물자를 담당한 부대를 기습하여 호된 타격을 주었다. 이렇게 되자 적들은 겨우 대오를 수습해가지고 살수(소자하)를 건너 봉황성 30리지점까지 다달았다. 그러나 철벽의 진을 치고있는 봉황성을 눈앞에 보게 되고 저들의 수군이 녹아났다는것을 알게 되자 극도로 실망하여 감히 덤벼들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을지문덕장군은 적장 우중문에게 적들을 야유, 조소하는 동시에 적들이 퇴각의 구실을 찾을수 있게 하는 시 한수를 지여 보냈다.

 

 

거듭되는 패배와 식량난으로 더는 지탱할수 없게 된 적들은 총 퇴각하지 않을수 없었다.

고구려군은 때를 놓치지 않고 드세찬 공격을 들이대면서 추격하여 612년 7월 24일에는 적들을 살수에까지 몰고갔다.

 

 

 

수나라침략군이 살수를 건느기 시작하자 매복하고있던 고구려군은 일제히 떨쳐나서 전후좌우에서 적들을 무리로 족치는 통쾌한 섬멸전을 벌리였다. 그리하여 이 전투에서 고구려군대는 침략군을 거의다 섬멸해버렸다.

살수전투에서 살아돌아간 적들은 겨우 2 700명뿐이였다. 이것을 우리 나라 력사에서는 《살수대첩(薩水大捷)》이라고 자자손손 긍지높이 불렀으며 그것을 고구려의 강대성과 민족적기개의 상징으로 여겨왔다.

고구려군은 기세를 늦추지 않고 퇴각하는 적을 도처에서 추격섬멸하였다.

결국 612년 수나라 300만대군의 침공은 적의 대참패로, 고구려의 승리로 끝났다.

△ 수나라의 제3차(613년), 제4차(614년)침입과 그 격퇴

거듭 참패를 당한 수나라의 양제는 심각한 교훈을 찾을 대신 고구려를 기어이 《정복》함으로써 떨어진 저들의 《위신》을 추겨세워보려는 야망을 집요하게 추구하였다.

양제는 두차례의 침입에서 당한 쓰디쓴 참패에 대한 앙심까지 모아 부랴부랴 군대를 징발하였다.

― 613년 3차침입과 그 격퇴

613년 1월 수양제는 전국각지에서 무술과 용맹이 있다는자들과 경험있는 장수들을 다시 모집하여 등용하였다.

그리고는 먼지방에서 군량을 날라오도록 하고 4월 27일 료수를 건넜다.

적들은 수십만의 병력으로 신성, 료동성을 포위공격하였다. 100만개의 포대로 성벽높이와 가지런히 쌓고 큰 다락수레를 만들어 성을 내리공격하였다.

이러한 때 수나라 양현감이 6월 2일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들은 양제는 무기, 기자재들을 버리고 수많은 시체를 남긴채 그해 6월에 쫒겨가고말았다.

결국 613년 수나라침략군의 침입은 고구려의 완강한 방어전투와 수나라의 내부모순으로 실패하고말았다.

― 614년 4차침입과 그 격퇴

614년 7월 양제는 세차례의 참패에서 응당한 교훈을 찾을 대신 기어이 고구려를 먹으려고 또다시 침략전쟁을 도발하였다.

양제는 수군으로 하여금 료동반도에 있던 고구려의 비사성을 공격하도록 하였다.

그런 찰나에 수나라안에서는 인민들의 투쟁이 쉴새없이 일어나 정세가 험악해졌지만 수양제는 7월 17일 회원진에 당도하였다.

고구려는 적들이 가는곳마다에서 드세찬 타격을 가하여 더는 헤여날수 없게 하는 한편 외교적공세를 들이대여 적들을 수세에 빠뜨렸다.

수양제는 할수 없이 8월 4일 총퇴각명령을 내리고 제소굴로 도망치고말았다.

고구려에 대한 침략에서 심대한 타격을 당한 수나라는 618년에 드디여 멸망하고말았다.

△ 승리의 요인과 의의

고구려인민들은 수나라침략자들의 네차례에 걸치는 대규모적인 침략을 물리치고 나라의 자주권과 민족의 존엄을 영예롭게 지켜냈다.

― 승리의 요인

• 정의의 조국방위전에 일떠선 고구려인민들이 높은 애국심과 희생성을 발휘하여 누구나 다 용감하게 싸운데 있다.

반대로 수나라군대는 부정의의 침략전쟁에 내몰리운 오합지졸이였으며 이런것으로 하여 전투사기가 극도로 저락되여있었다.

• 고구려군은 자기 강토에서 견고한 방어시설에 의거하여 싸웠고 또 강력한 국력에 기초하여 충분한 식량과 우수한 무기무장을 보장받을수 있었으나 수나라군사는 후방공급이 거의나 보장되지 못하여 전투력이 매우 약하였다는데 있다.

• 고구려군이 을지문덕과 같은 유능한 군사지휘관의 지휘밑에 구제적조건과 실정에 맞는 전략전술을 적용하였다는데 있다.

• 고구려는 국내형편이 안정되여 싸웠으나 수나라는 각지에서 일어난 대규모적인 폭동, 지배계급내부의 반란 등으로 나라의 질서가 다 무너지고 힘을 모을수 없었다는데 있다.

― 승리가 가지는 의의

• 중세 우리 인민의 반침략조국방위투쟁에서 가장 빛나는 모범을 창조하였다는데 있다.

• 고구려의 대외적위신을 비상히 높여주었다는데 있다.

아시아대륙에서 제일 강대하다고 하는 수나라의 300만대군을 성과적으로 물리침으로써 고구려의 대외적위신은 비상히 높아지게 되였다.

• 수나라의 멸망을 촉진시킨 결정적요인으로 되였다는데 있다.

전쟁에서의 패배는 수나라 내부의 정세를 악화시켰으며 각지에서 농민봉기를 야기시킨 중요한 계기로 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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