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후조선의 성립과 노예제적관계의 정비강화, 생산의 발전

 

△ 후조선의 성립

단군조선은 오래동안 강대한 나라로 존재하였다. 그러나 그 말기에 이르러 날로 격화되는 계급적 및 지역적인 모순과 대립으로 말미암아 쇠퇴몰락의 길에 들어섰다. 이 시기에 노예제적압박과 착취를 반대하는 노예를 비롯한 피압박대중의 투쟁이 강화되고 오랜 력사를 통하여 자기의 정치경제적힘을 키워온 각지 후국의 통치자들속에서 고조선으로부터 분립, 자립하려는 움직임이 많이 나타났다. 바로 이러한 환경속에서 1500년이상 존속해온 단군조선(전조선)이 무너지고  B.C. 15세기 중엽에 새 왕조가 섰다. 이 왕조를 력사에서 《후조선》이라고 한다.

- 후조선의 성립은 결코 새로운 나라의 성립을 의미하는것이 아니였다.

그것은 본질상 고조선국가안에서 일어난 왕조교체였으며 새로 나타난 후조선은 어디까지나 전조선(단군조선)의 계승국이였다.

새 왕조의 집권층은 여전히 나라이름을 《조선》이라 불렀고 수도는 여전히 평양(왕검성)이였다. 나라의 정치 및 경제제도, 계급관계면에서도 근본적인 변화가 없었고 경제문화발전에 있어서도 전조선시기에 형성된 전통을 그대로 계승하였다.

후조선이 단군조선의 계승국이였다는것은 전조선왕조의 마지막임금과 그 후손들에게 높은 대우를 해준데서도 찾아볼수 있다.

《삼국유사》에 인용된 《고기》에는 후조선의 성립과 관련하여 단군이 장당경으로 옮겼다가 후에 아사달에 들어가 산신이 되였다는 기사가 실려있다. 이 이야기는 새 왕조의 창립자들이 전왕조의 마지막임금을 옛 부수도인 당장경(장당경)일대를 봉지로 떼주고 그와 그의 후손들이 잘 지낼수 있게 해주었다는것을 보여준다.

- 단군조선과 후조선의 교체시기는 B.C. 15세기 중엽이였다.
 《삼국유사》에 인용된 《고기》에는 단군이 1500년동안 나라를 다스리다가 후조선에 자리를 내준것으로 되여있고 《제왕운기》나 《세종실록》 지리지에 인용된 《본기》, 《단군고기》 등에는 은나라 무정8년 을미(B.C. 1286년 혹은 B.C. 1317년)에 왕자리를 내놓은것으로 되여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날 봉건대국주의, 사대주의사가들은 엉뚱하게도 후조선시기의 력사를 중국의 기자와 결부시켜 《기자동래설》, (《기자조선설》)을 퍼뜨리였다.

《기자동래설》은 기자라는 고대중국의 은나라귀족이 조선에 와서 나라를 세우고 우리 나라에 과학과 문화를 발전시켰다는것이다. 이러한 《기자동래설》은 한나라시기에 봉건대국주의사가들에 의하여 조작된 터무니없는 주장이다.

후조선의 령역은 건국초기에 후국들이 분립으로 단군조선강성기에 비해 북쪽과 남쪽에서 상당히 줄어들었다. 그러나 얼마후 서쪽으로 세력을 뻗쳐 오늘의 만리장성근방, 란하중류일대에까지 그 령역을 넓히였다.

후조선의 령역은 그 말기에 일정하게 변하였다. 후조선은 B.C. 3세기 초에 진개가 거느린 연나라군대의 무력침공에 의하여 《2 000여리》의 서쪽땅을 잃고 일시 료하서쪽 요양하일대까지 물러섰다. 그러나 곧 침략세력을 몰아내고 패수(대릉하)를 경계로 삼았으며 실제에 있어서는 패수서쪽의 상당히 넓은 지역을 자기의 세력권, 활동무대로 삼고있었다.

후조선은 북쪽, 동북쪽으로 철령일대(중국 료녕성의 도시), 평안북도와 자강도 접경지대, 함경남도일대를 계선으로 하여 진국과 접하고있었다.

후조선의 수도는 단군조선시기와 마찬가지로 평양(왕검성)이였다.

△ 통치체계의 정비강화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과거에는 인민을 억압하는 소수 통치배들이 인민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우로부터 강제로 정권을 만들었기때문에 그것은 항상 반인민적이며 관료적인 정권이였습니다.》

후조선은 전조선(단군조선)과 마찬가지로 세습적인 전제왕권이 지배하는 나라였으며 왕의 자리는 대대로 세습되였다.

후조선왕조시기의 왕대수는 40여대였다.

- 후조선의 통치층은 통치체제를 한층 더 정비보강하였다.

전조선의 계승국이였던 후조선은 관직제도, 통치기구가 단군조선의것과 비슷하였으나 후조선말기인 B.C. 3~2세기의 관직명을 보면 일련의 변화가 일어났다는것을 알수 있다.

이때 후조선에는 국왕과 비왕, 상, 대부, 박사, 장군 등이 있었다.

후조선의 통치자들은 단군조선시기의 법규범들에 토대하여 성립초기에 보다 발전된 성문법인 《범금8조》를 제정하였다.

오랜 성문법인 《범금8조》는 원래 8개 조항으로 되여있었으나 지금까지 전해지는것은 3개조항뿐이다.

《범금8조》의 법조항들은 대체로 형벌을 규정한것이지만 거기에는 민법적요소도 포함되여있다. 《범금8조》는 당시에 존재한 보상, 매매와 같은 현상들을 법적으로 인정하고 소유권, 채권, 채무와 관련된 민법제도를 유지공고화할것을 노린것이였다.

- 후조선에는 강유력한 상비무력이 갖추어져있었다.

후조선통치배들은 대내적으로 인민들의 반항을 억누르고 대외적으로는 외래침략자들을 쳐물리치기 위하여 강력한 무력을 가지고있었다.

옛 기록에 의하면 B.C. 4세기 말엽에 연나라 왕이 동쪽 고조선땅을 빼앗으려고 하자 고조선왕이 군사를 일으켜 연나라를 맞받아칠 기세를 보이면서 대부대를 파견하여 적의 무력침공기도를 파탄시켰다고 한다. 이것은 당시 고조선이 수십만의 보병과 기병 6 000명을 가지고있던 연나라를 압도할수 있는 강한 군사력을 보유하고있었다는것을 말하여준다.

후조선을 포함한 고조선시기의 군대는 크게 중앙군과 지방군으로 이루어져있었다.

중앙군은 주로 수도방위의 임무를 담당하고있었다. 직할지라 하더라도 중심지역에서 멀리 떨어져있는 지역이나 후국의 군대는 변방(지방)수비를 담당한 지방군으로 되여있었다.

고조선에서 중앙군과 지방군전체에 대한 통수권은 국왕이 쥐고있었다. 후국안의 군대에 대한 지휘통제는 실제상 후국왕들에게 맡겨져있었다. 후조선 말기에 후국의 왕이였던 만이 자기 무력을 동원하여 왕검성을 공격한 사실은 그것을 뚜렷이 보여준다.

고조선의 군대는 륙군과 수군으로 편성되여있었고 륙군은 다시 보병과 기병으로 구분되여있었다.

고조선의 군대는 수적으로 상당히 많았을뿐아니라 당시로서는 발전된 무기무장을 갖추고있었다. 고조선의 유적들에서 많이 나온 청동으로 만든 단검, 창, 과, 쇠뇌 등과 철로 만든 장검, 단검 등이 많이 나온 사실, 또 옛날책들에 고조선사람들은 창을 가지고 보병전투를 잘하였는데 긴 창을 여러명이 쥐고 싸웠다고 한것이라든지 고조선의 활이 《락랑단궁》이라는 이름으로 이웃나라에까지 널리 알려져있었다고 한것 등은 그것을 잘 말하여준다. 점차 철제무기의 수가 급속히 늘어나 그 말기에는 철제무기무장이 무기구성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였다.

이처럼 후조선은 발전된 노예소유자국가에 맞는 통치체제를 갖추고있었다.

△ 노예제적관계의 정비강화

후조선성립이후 노예제적관계가 한층 더 확대강화되여 자기발전의 가장 높은 단계에 이르게 되였다. 이 시기에 노예제도를 보다 철저히 옹호할수 있게 《범금8조》와 같은 성문법이 제정되고 대량적인 노예순장이 있은 사실은 노예제적관계가 발전하였다는것을 보여준다.
   순장은 원시사회말기나 후세의 봉건국가들에서도 더러 있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노예소유자사회에 고유한 풍습이였으며 노예순장이 더욱 성행한것은 노예제사회의 발전기에 해당된다.

후조선시기에 대량적인 노예순장이 널리 벌어졌다. 료동반도끝에 있는 중국 료녕성 대련시 감정자구 후목성역의 강상무덤과 루상무덤 등은 그것을 잘 말해주고있다.

 

 

강상무덤

 

강상무덤은 한명의 노예주를 위하여 140여명의 노예와 측근자들을 같이 파묻어죽인 큰 순장무덤이다.

무덤의 중심에는 노예주가 묻혔던 돌곽(7호무덤구뎅이)이 있고 그 주변에 노예를 순장한 무덤구뎅이들이 놓여있는데 주변의 무덤구뎅이들은 다 돌곽을 둘러싸듯 돌곽을 중심으로 하여 사방으로 배치되여있다. 노예주의 무덤구뎅이는 큰 판돌을 다듬어 규모있게 만들었는데 거기에 3명분의 사람뼈만이 있었다. 그러나 노예들의 무덤구뎅이는 되는대로 만들었을뿐아니라 한 구뎅이에 보통 7명 지어 18명을 마구 묻어놓았다. 노예무덤구뎅이들에 무질서하게 있는 뼈가운데는 아이들의 뼈도 있었다. 이것은 노예주를 위하여 죽음을 강요당한 노예들의 비참한 처지를 잘 보여주고있다.

루상무덤 역시 많은 노예들을 순장한 무덤이다.

 

 

이러한 사실들은 후조선초기까지도 노예순장이 널리 진행되였으며 노예제도가 높은 단계에 이르렀다는것을 확증하여준다.

이 시기에 노예수가 늘어나고 개별적인 노예주들의 경리가 더욱 장성하였다.

강상무덤의 주인공은 적어도 수백명이상의 노예를 가진 한개 지방의 대노예주였다고 볼수 있다. 이러한것들에 비추어볼 때 고조선의 중심부에 살고있던 왕족이나 중앙귀족들은 그보다 훨씬 더 많은 노예를 가지고있었을것이다.

개별적인 노예주들의 경리가 장성하면서 공동체적경리형태와 자영소농민적경리형태의 비중이 줄어들고 노예소유자적경리형태의 비중이 훨씬 높아졌으며 로동노예의 수와 모든 생산령역에서 노예로동의 비중이 더욱 높아졌다.

고조선에서 노예제도의 발전과정은 이렇듯 단군조선강성기이래 후조선중기까지 계속되였다. 그러나 노예를 비롯한 피압박인민들의 줄기찬 투쟁에 의하여 노예제적관계는 후조선후기에 급격히 내리막길에 들어섰다.

노예제경리의 끊임없는 확대과정은 노예주들사이의 충돌을 동반하였으며 인민들의 사회적처지를 더욱 악화시켰다.

노예제적인 압박과 착취가 강화되면서 자주성을 옹호하기 위한 피압박인민들의 투쟁이 날로 강화되였다.

피압박인민들의 줄기찬 투쟁은 노예주들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고 노예제도를 밑뿌리채 뒤흔들어놓았으며 노예들의 처지에서 일정한 변화를 가져왔다.

우선 노예순장제가 B.C. 7세기~B.C. 6세기부터 급격히 없어져간 사실에서 볼수 있는바와 같이 노예주들은 점차 노예를 제마음대로 죽일수 없게 되였다.

노예주들은 또한 일부 노예들에게 종래와는 다른 착취방법을 적용하지 않을수 없게 되였다. 즉 일부 노예들에게 땅을 떼여주고 자체로 농사를 짓게 한 다음 그 수확물가운데서 재생산에 필요한 적은 량을 남겨주면서 나머지를 빼앗았으며 수시로 그들의 로동력을 수탈하는 방법으로 착취하기 시작하였다. 노예주들은 일부 몰락한 자영소농민들에 대해서도 이러한 착취방법을 적용하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이전의 노예와 몰락한 평민들이 점차 봉건적인 농노로 전환되기 시작하였다는것을 의미한다.

농노도 역시 인간이하의 처지에 놓여있었다. 그러나 농노는 노예와 달리 인신적예속의 면에서 노예보다 좀 나았으며 착취의 강도면에서도 종래보다 좀 나았다.

이처럼 노예제적예속을 반대하는 노예를 비롯한 피압박인민들의 장기간에 걸친 피어린 투쟁의 결과 후조선말기에 새로운 봉건적인 관계가 싹트고 노예제도에 금이 가기 시작하였다.

△ 생산의 발전

후조선시기에 생산력은 단군조선시기에 비하여 훨씬 발전하였다.

- 농업의 발전

후조선시기에 기본생산령역이였던 농업이 급속히 발전하였다.

• 농업의 발전은 농기구의 개선에서 뚜렸이 나타났다.

후조선시기의 유적들에서 어디서나 금속제공구들이 자주 나온다.

루상무덤에서 2점의 청동제도끼, 3점의 끌, 2점의 칼, 1점의 송곳 등이 발굴되였는데 이 시기 사람들은 이러한 공구를 가지고 후치를 비롯한 나무농기구들을 더 많이 잘 만들어 리용하였다.

특히 후조선사람들은 후기에 이르러 철제농구를 생산에 널리 썼다.

 

 

철제농구

 

평안북도 녕변군 제죽리, 중국 료녕성 무순시 련화보를 비롯한 후조선후기의 유적들에서는 호미, 괭이, 삽, 낫, 반달칼, 도끼 등 다양한 철제농기구가 드러났는데 그것들은 산림채벌과 토지개간, 논밭고루기와 씨뿌리기로부터 김매기, 가을걷이에 이르는 농사의 전 공정에 필요한 농기구를 거의다 포괄한것이다. 더우기 주목되는것은 매개 유적들에서 많은 철제농기구가 드러난 사실이다. 례컨데 세죽리부락터에서는 도끼 수십개, 낫 5개, 괭이 3개, 호미 1개가 드러났고 련화보유적에서는 도끼 60여개, 괭이 1개, 호미 2개, 낫 2개가 나왔다.

철제농기구가 대대적으로 보급되면서 나무농기구가 점차 뒤자리로 밀려나고 돌도구가 종국적으로 구축되였다.

• 후조선사람들은 축력을 농업생산에 널리 받아들이고 영농방법을 끊임없이 개선해나갔다.

후조선시기유적들에서 마구와 함께 소뼈 등이 드러나며 평안북도 염주군 주의리 니탄층속에서 2개의 큰 참나무후치와 직경이 1.6m나 되는 큰 수레바퀴가 발굴되였다. 이것은 후조선시기에 부림짐승을 리용하여 논밭을 갈고 짐을 운반하는 등의 일이 상당히 널리 보급되였던 사실을 보여준다.

그리고 쇠호미, 쇠낫 등이 등장하면서 김매기가 더욱 일반화되고 가을걷이 방법도 점차 이삭이나 대를 베여들이는데로 넘어가기 시작하였다.

고대조선주민들은 다양한 작물을 널리 재배하면서 논벼재배면적을 확대하고 재배방법을 개선해나갔다.

이처럼 농기구와 영농방법이 개선되고 축력이 더 널리 보급되면서 부침땅면적이 늘어나고 토지리용과 로동생산능률이 훨씬 높아지게 되였으며 그에 따라 알곡생산이 부단히 증대되였다.

- 수공업의 발전

• 제철제강업의 개척

 

 

 

발전된 청동제품들

 

후조선에서는 청동기문화가 매우 높은 수준에 올라섰다. 여러 유적의 비파형단검을 계승한 좁은놋단검, 잔줄무늬거울과 강상무덤의 그물치레거리를 비롯한 당시의 청동제품들은 그것을 보여준다. 당시 청동의 합금비률을 보다 합리적으로 능숙하게 조절할수 있게 되였으며 그 가공기술을 높은 수준에 올려세웠다. 강상무덤의 그물치레거리들은 0.25mm의 가는 구리실을 뽑아내였다는것을 실물로 보여준다.

• 무기제작

좁은놋단검과 좁은놋창, 과와 같은 청동제뿐아니라 단검과 장검, 창, 가지창, 쇠뇌 등 여러가지 위력한 강철제무기무장을 만들어내였다. 특히 장검, 쇠뇌, 가지창 등은 이전 시기에는 볼수 없었던 새로운 무기류였다.

또한 활을 발전시켜 만든 쇠뇌는 격발장치를 달아 화살을 더 멀리 정확하게 쏠수 있게 한것으로서 가장 위력한 무기의 하나였다. 비파형단검을 발전시켜 만든 좁은놋단검은 비파형단검에 비하여 검몸이 좁고 날카로와 실용성이 높았으며 용도에 맞게 재질의 청동합금비률을 잘 맞춘 매우 굳은것이였다.

• 공구제작

고조선사람들은 강철제공구들을 가지고 나무제품들도 훌륭하게 만들어내였다. 특히 고조선사람들은 민족적정서가 흐르는 훌륭한 수레를 만들었다. 두마리의 말이 끌게 된 수레에는 뒤부분에 앉는 자리가 있고 일산을 세워 해빛을 가리우게 만들었다. 금동 또는 청동제부속으로 장식된 호화로운 수레들은 당시 고조선주민들의 세련된 금속 및 나무가공솜씨를 보여준다. B.C. 3세기~B.C. 2세기의 무덤들에서 수레부속품들이 적지 않게 나오는것을 보면 이러한 수레가 널리 보급되였다는것을 알수 있다.

• 질그릇과 도기의 발전

당시의 질그릇들은 대부분 돌림판을 리용하여 빚어냈으며 서북조선과 료동지방에서 나온 굽접시, 바리, 단지, 항아리 등은 규격화되여 그 크기와 무늬수법이 거의 같다. 이러한 사실은 질그릇, 도기제조업이 더욱 발전하여 독립적인 수공업분야로 전문화되여있었다는것을 보여준다.

- 국내외상업의 발전

당시 상업의 발전면모는 화페가 널리 쓰인 사실에서 알수 있다. 서북조선과 료동반도일대의 여러 유적들에는 명도전과 일화전 등 청동화페들이 많이 나왔다. 한 유적에서 수백, 수천매의 명도전이 무데기로 나온 례가 적지 않다.

후조선은 여러 나라들과 대외무역을 활발히 진행하였다. 강상무덤에서 중국의 남방산 보배조개가 나온 사실, B.C. 7세기경에 중국의 제나라와 무역을 했다는 《관자》의 기록 등은 그 일단을 전해주고있다.

고조선에서는 이름난 락랑단궁(활), 과하마, 범가죽, 돈피 등의 특산물과 그밖의 수공업제품, 해산물들을 많이 수출하였다. 이러한 무역을 통하여 우리 나라와 중국사이의 문화교류가 이루어졌다.

이렇듯 후조선인민들은 자기의 슬기와 재능, 근면한 로동으로 여러 령역에서 새로운 발전을 이룩하여 당시 나라의 경제를 높은 단계에 올려세웠다. 그러나 노예제가 지배하던 력사적조건에서 귀중한 물질적재부들은 창조자자신의 향유물이 되지 못하고 노예주들의 독점물로, 그들의 치부와 향락에 탕진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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