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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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편 원시 및 고대사회
제2장 고대국가들의 성립과 발전
제1절 고조선의 성립과 단군조선의 발전
2. 단군조선의 발전

 

단군조선은 성립이후 국력을 부단히 키우면서 주변의 소국들과 정치세력들을 하나하나 통합하여 령토를 넓히였다.

이러한 통합과정을 거쳐 단군조선의 령역은 그 강성기에 조선반도의 대부분과 료하류역, 북류송화강류역의 일부, 길림일대를 포괄하는 넓은 지역에 미치게 되였다.

 

 

 단군조선의 령역

 

단군조선의 통치층은 국력의 장성과 령토확장에 발맞추어 중앙과 지방의 통치제도를 부단히 정비보강해나갔다.

△ 통치체제의 정비강화

최고권력자; 왕

단군조선은 세습적인 군주제형식의 고대왕조였다. 단군조선에서 나라의 최고통치권은 군주(임금, 왕)에게 속해있었고 그 지위는 대대로 세습되였다. 《규원사화》에는 제1대 단군으로부터 47대 고렬가에 이르는 단군조선시기의 왕들의 이름과 그 계통이 전해오는데 그에 의하면 단군이후의 력대왕들은 다 단군의 후손들로 되여있다.

― 왕밑에 비교적 째인 중앙관직과 통치기구가 갖추어져있었다.

• 중앙통치기구

단군조선에는 그 첫 시기에 이미 《가》라고 불리우던 여러명의 대신급 중앙관료가 있었다. 그 명칭과 그가 맡아 수행한 기능을 보면 다음과 같았다.

① 호가(룡가) : 수석관료로서 나라의 모든 관료들을 총괄할 임무를 맡은 벼슬자리(단군때  부루)

② 마가: 임금의 명령을 아래에 전달하고 지방과 각 관청에서 올라오는 문서들을 왕에게 보고하는 임무를 담당한 벼슬자리(단군때 신지)

③ 우가: 농업생산을 주관하던 벼슬자리(단군때 고시)

④ 웅가: 나라의 군사를 담당한 벼슬자리

⑤ 응가: 형벌을 담당한 벼슬자리

⑥ 로가: 보건 등을 담당한 벼슬자리

⑦ 학가: 나라의 도덕규범과 각종 의례 등을 맡은 벼슬자리

⑧ 구가: 지방행정을 장악할 임무를 맡은 벼슬자리

⑨ 봉가: 조세징수를 맡은 벼슬자리

이밖에도 치산치수, 수공업 등을 맡은 관직들이 더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중앙관직에는 그들이 관할하던 일정한 관청과 하급관리들이 있었다.

단군조선시기 중앙통치기구는 상당히 째여있었다. 중앙관직과 통치기구가 정치, 경제, 군사, 문화 등 부문별로 일정하게 세분화되여있었을뿐아니라 그 우에 서서 그것들을 통일적으로 장악통제하는 호가와 같은 수석관직이 갖추어져있었다. 이것은 단군조선시기의 중앙통치기구가 나라의 령토와 주민전반을 폭넓게 또 통일적으로 다스릴수 있는 비교적 정연한 기구체계를 갖추고있었다는것을 의미한다.

단군조선에는 중앙의 대신급 가들을 기본으로 하고 그밖의 고위계층을 망라한 귀족들의 민주주의적평의기구로서 제가평의회가 있었다.

이처럼 단군조선의 군주는 호가를 비롯한 중앙관료들을 거느리고 제가평의회에 의거하여 나라를 다스려나갔다.

• 지방통치기구

단군조선시기에 지방통치체제도 기본적으로 정비되여있었다.

지방통치단위는 크게 직할지와 후국으로 나뉘어져있었다.

수도 왕검성(평양)을 비롯한 직할지는 왕이 직접 관할통치하였는데 그밑에는 여러개의 고을들로 이루어져있었다.

단군조선의 넓은 판도안에는 직할지밖에 부여, 구려를 비롯한 크고작은 후국들이 있었다.

후국은 단군조선의 한 부분을 이루고있었으나 후국의 통치자가 자기의 독자적인 관료체계와 군사력을 가지고있었다.

단군조선은 후국들에 대하여 일정한 공납과 군사적의무를 지웠다.

단군조선의 군주는 후국을 그 통치자에게 맡기고 그를 통제하는 방법으로 후국에 대한 지배를 실현하였다.

• 부수도제도

고조선시기의 지방통치제도에서 특색있는것은 부수도제도였다.

당시의 교통운수조건에서 넓은 령토를 다스리자면 수도에 대응하는 지방통치의 거점으로서 부수도들이 필요하였다. 그러한 부수도가 몇개나 되였는지는 알수 없지만 구원산일대의 장당경은 그러한 부수도의 하나였다. 부수도들은 거기에 왕이 나가있으면 수도와 거의 같은 기능을 수행하군 하였다.

• 법과 상비무력

단군조선의 지배층은 노예제도를 유지하며 노예소유자국가와 노예주들의 리익을 옹호하기 위하여 여러가지 법을 내오고 많은 상비무력을 가지고있었다.

고조선초기부터 법이 제정되여 있었으며 후조선시기에는 《범금8조》라는 형법이 성문법으로서 제정되여 있었다. 그 가운데서 오늘까지 전해지고있는것은 3개 조항뿐이다. 첫째로 사람을 죽인 자는 즉시로 사형에 처하며, 둘째로 남에게 상처를 입힌 자는 곡식으로 보상하여야 하며, 셋째로 남의 물건을 도적한 자는 남자의 경우에는 도적맞은 자의 노예로 만들고 녀자의 경우에는 그 집의 녀자노예로 만들며 만일 도적한 자가 죄를 벗으려면 50만의 돈을 내야 한다. 이 법은 철저히 노예소유자들의 리익을 옹호하기 위하여 만든 법이였다. 노예주들은 노예들을 팔고 살수 있었으며 마음대로 죽일수도 있었다. 그러므로 고조선의 형법은 철저하게 노예소유자들의 리익을 옹호하며 노예를 비롯한 인민들을 억압착취하기 위한 반인민적악법이였다.

고조선에는 통치배들이 저들의 계급적지배를 유지강화하며 외부의 침략세력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한 상비적인 군대가 있었다.

군대에는 중앙군과 지방군이 있었는데 이는 륙군과 수군으로 편성되여있었으며 륙군은 보병과 기병으로 이루어져있었다. 그들의 무기는 대체로 활, 비파형단검, 좁은놋단검, 방패와 창, 도끼, 과, 갑옷 등이였다.

이처럼 단군조선은 비교적 정연한 통치기구와 법, 군대 등 상당히 째인 통치제도를 가진 고대국가였다.

• 노예소유자적인 사회경제관계의 확대

단군조선시기의 경리형태는 노예소유자경리형태와 자영소농민적경리형태, 공동체적경리형태로 이루어져있었다.

단군조선의 건국 첫 시기에는 공동체적경리의 비중이 높았다. 나라의 변방과 후국들에서 더욱 그러하였다. 그러나 공동체적경리형태는 세월의 흐름과 함께 부단히 노예소유자적경리형태와 자영소농민적경리형태로 전환되여갔다.

단군조선시기에 량적으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것은 자영소농민적경리형태였다. 그러나 자영소농민들의 개개의 경리는 전반적으로 령세하였으며 부단히 파산몰락되여 노예소유자적경리형태에 흡수되여갔다.

단군조선시기의 주도적인 경리형태는 노예소유자적경리형태였다. 이 경리형태에는 노예소유자국가가 직접 경영하던 노예제경리와 개별적인 노예주들의 경리가 포함되여있었다.

노예소유자적경제관계는 국가권력의 작용밑에 부단히 확대되였다.

단군조선시기 노예제도의 확대발전과정은 크게 두 측면에서 추진되였다.

우선 나라의 령역이 급격히 확대되고 그의 영향력이 커짐에 따라 당시로서 선진적인 고조선의 사회경제관계는 끊임없이 넓은 지역으로 확대되여나갔다.

한편 국가권력의 비호밑에 전쟁포로와 형벌, 채무 등 여러가지 공간을 통해 노예수가 부단히 늘어나고 그에 따라 개별적인 노예주들의 경리가 더욱 커지게 되였다. 그리하여 상당히 큰 규모의 노예제경리를 가진자들이 나타나게 되였다. 특히 왕과 중앙의 특권층, 후국의 통치자들이 그러하였다. 뚜껑돌의 면적이 50㎡이상이나 되고 무게가 50~70t, 지어 100t이나 되는 엄청나게 큰 고인돌무덤의 주인공들이나 장리 1호, 2호고인돌무덤(황해북도 상원군)과 같이 특별히 많은 값진 부장품유물들이 나오는 무덤의 주인공들은 다 대노예주들이였다.

단군조선시기에 노예소유자적경리형태는 지배계급이 의거하고있던 기본경리형태였으며 부단히 확대되고있었다. 그러나 당시 노예수는 그리 많지 않았으며 가내노예가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였던것으로 보인다.

• 계급신분관계

노예제가 지배하던 단군조선에서는 나라의 정치 및 경제제도에 맞는 계급관계가 이루어져있었다.

단군조선시기의 지배계급, 착취계급은 노예주계급이였다. 노예주들은 신분적으로는 기본상 귀족들이였다.

노예주계급은 나라의 중요한 벼슬자리들을 독차지하였으며 또 그 권력을 배경으로 하여 많은 토지와 노예를 소유하고 피압박대중을 가혹하게 억압착취하던 특권계층이였다. 노예주계급가운데는 제천행사 등을 주관하던 신관계층도 포함되였다.

노예주계급은 다시 대노예주와 중소노예주계층으로 갈라져있었다.

단군조선시기 지배계급, 노예주계급의 무덤인 고인돌무덤들이 그 크기와 부장품의 량, 질 등에서 차이를 가지고있는것은 노예주계층간 차이를 반영한것이다.

단군조선시기의 피지배계급, 피착취계급은 자영소농민을 비롯한 평민과 노예계층이였다.

평민은 원시사회의 붕괴기에 출현한 계층으로서 종래의 일반 공동체성원들이였다.

평민에는 직업상으로 보면 농민과 수공업자, 상인계층이 포함되여있었으며 여기서도 기본계층을 이룬것은 자영소농민들이였다.

자영소농민들은 당시 주민의 대다수를 차지하고있었는데 이들이 노예소유자국가에서 수탈의 기본대상이였고 군역의 기본부담자들이였다. 이들은 노예소유자국가와 노예주들의 압박과 수탈로 말미암아 항상 비참한 처지에서 헤메이였으며 몰락하여 노예로 굴러떨어지기가 일쑤였다.

단군조선시기에 인간이하의 처지에서 헤메던 최하층의 피압박대중은 노예였다.

노예주들은 노예를 비인간적으로 학대하고 멸시하면서 소나 말처럼 혹사하였을뿐아니라 마음대로 사고 팔고 죽이였다. 룡산리의 순장무덤은 노예들의 처지가 얼마나 비참하였는가를 그대로 보여주고있다. 노예는 그야말로 《말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단군조선시기에 피지배계급가운데는 아직 공동체적관계에서 벗어나지 못한 계층들도 일정하게 존재하였다. 이러한 계층은 국가성립초기 변방에 많았다. 고조선국가는 그들도 공납형태로 착취하였으며 그러한 주민계층의 처지는 사실상 노예와 다름이 없었다.

단군조선의 주민은 이렇게 노예주계급을 한편으로 하고 노예와 평민 등을 다른편으로 하는 적대되는 두 계급으로 갈라져있었으며 이 두 적대계급사이의 치렬한 대립과 투쟁이 단군조선시기 사회관계의 기본을 이루고있었다.

△ 생산의 발전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세상에서 고귀하고 아름다운 모든 물질적 및 문화적재부가 근로자들의 로동에 의하여 창조됩니다.》    

단군조선의 성립은 생산력발전을 추동하는 중요한 계기로 되였다.

자연을 정복하고 자기들의 생활을 끊임없이 개선해나가기 위한 인민들의 창조적투쟁에 의하여 고조선에서는 일찍부터 농업, 목축업, 수공업을 비롯한 경제의 여러 부문이 상당한 정도로 발전하였다.

― 농업의 발전

고조선의 경제에서 기본자리를 차지한것은 농업이였다.

국가성립 훨씬 이전시기부터 우리 선조들의 기본생업은 농업이였으며 따라서 단군조선은 발전된 농경문화를 가진 농업위주의 나라로 등장하였다.

 

 

 

• 고조선에서는 소를 리용한 보습농사가 널리 보급되고 그 운반수단으로서는 수레가 리용되는 등 농업기술이 상당한 정도로 발전하였다.

황해북도 봉산군 지탑리유적 제2기층의 신석기시대 문화층에서는 완전한 형태를 갖춘 돌보습만도 20여개나 발굴되였다. 이것은 국가성립이전 시기에 벌써 갈이농법이 상당히 보급되였다는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단군조선시기의 고대유적들에서는 반달칼이나 갈돌과 같은 수확용농기구나 곡식가공용도구는 흔히 보이지만 돌보습 등 갈이도구, 경작도구는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이러한 현상은 나무로 만든 농기구가 널리 쓰이고 나무후치나 보습 등에 의거하여 갈이농법이 더욱 발전한 사실의 반영으로 볼수 있다.

일찍부터 철기를 만들어쓰기 시작한 고조선인민들은 그후 철가공기술을 더욱 발전시켜 괭이와 삽, 도끼, 호미, 낫, 반달칼 등 예리하고 든든한 철제농기구 및 공구들을 널리 만들어썼다. 예리한 날을 가진 철제도구의 발전은 나무로 만든 농기구들을 더욱 개량하고 발전시켰으며 더 복잡한 구조를 가진 생산성이 높은 갖가지 농기구들을 만들수 있게 하였다.

고조선에서 농업생산도구의 개선은 농업생산을 한층 더 발전시켰다.

• 단군조선시기 농업의 발전은 재배작물의 품종이 다양해지고 벼농사가 발전한데서 찾아볼수 있다.

고조선사람들은 토양기후조건에 맞게 벼, 조, 보리, 수수, 기장, 콩 등 여러가지 알곡작물들을 재배하였으며 삼을 비롯한 공예작물들도 재배하였다.

우리 나라에서 농사가 시작되던 초기에 재배한 알곡작물은 기장이였다. 그러나 재배작물을 끊임없이 탐구해낸 단군조선시기에는 피, 조, 수수, 콩, 팥 등 다양한 밭작물들을 널리 재배할수 있게 되였다.

단군조선시기에 벼농사도 상당히 보급되였다. 국가성립 이전시기인 B.C. 4000년기 후반기에 해당하는 남경유적 36호집자리에서 종자로 쓰려고 보관하였던 벼를 비롯한 5곡이 드러난 사실, 단군조선초기인 B.C. 3000년기 전반기에 해당하는 표대유적(평양시 삼석구역)에서 벼와 콩이 나온 사실 등이 그것을 잘 보여준다.

 

 

 

 남경유적에서 발굴된 탄화된 5곡

 

평양일대에서 일찍부터 발전한 벼농사는 김포, 서산을 비롯한 여러 지역으로 퍼져나갔다.

• 단군조선시기 농업의 발전은 알곡생산량이 늘어난데서도 찾아볼수 있다.

B.C. 3000년기 후반기에 해당하는 석탄리유적(황해북도 송림시)의 팽이그릇문화 3기층 집자리에서는 반달칼이 호당 평균 7개나 나왔는데 그 이전 B.C. 3000년기 전반기의 1기층 집자리에서 드러난 반달칼의 수는 호당 평균 2개에 지나지 않는다. 남경유적의 경우에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이와 같이 곡식의 이삭을 자르는데 쓰는 반달칼의 수가 많은것은 이 시기에 알곡생산량이 장성하였다는것을 보여준다.

- 목축업의 발전

고조선사람들은 농업에 주되는 힘을 넣으면서 집짐승기르기와 물고기잡이, 사냥 등에서도 큰 발전을 이룩하였다.

고조선사람들은 소, 말과 같은 부림짐승들과 돼지, 닭 등 여러가지 집짐승을 많이 길렀다.

- 수공업의 발전

고조선사람들은 수공업생산도 높은 단계에 올려세웠다.

단군조선시기 새로운 수공업분야가 개척되고 그 생산량과 기술수준이 전반적으로 뚜렷이 높아졌다.

• 청동을 비롯한 금속제련 및 가공업이 발전하였다.

고조선초기의 유적들에서 드러난 청동제비파형창끝과 청동단추, 청동기쪼각 등은 국가성립이전시기에 시작된 청동기문화가 고조선국가의 성립과 함께 높은 수준으로 발전하여갔다는것을 보여주는 동시에 청동가공업이 일찍부터 독립적인 수공업부분으로 되였다는것을 말하여준다.

고조선의 청동기유물가운데서 비파형단검과 그것을 이은 좁은놋단검은 대표적인 유물로 알려지고있는데 그것들은 여러 발전단계를 거치면서 그 형태와 질, 구조, 제작수법, 무늬 등이 변화발전되였음을 보여준다.

단군조선초기에 이미 동-석-연의 3원합금체계에 속하는 청동합금을 얻어냈으며 그것으로 비파형단검과 창끝, 끌, 단추를 비롯한 각종 무기와 공구, 치레거리들을 만들어냈다.

고조선시기의 유적들에서 드러난 청동제 도끼, 끌, 창, 활촉, 거울, 팔찌, 비녀 등과 이보다 늦은 시기의것인 좁은놋창끝, 놋과 잔줄무늬거울 등은 고조선시기 청동기의 품종이 다양하였고 그 주조솜씨가 매우 세련되여있었으며 원소조성에서도 그 용도에 따라 합금비률을 정확하게 타산하였다는것을 보여준다.

B.C. 12세기 이전부터 철기를 사용하여 온 슬기롭고 재능있는 고조선인민들은 그후 철기문화를 더욱 발전시켜 B.C. 7세기경에 이르러서는 고온야금법에 의한 탄소공구강을 생산해내게 되였다.

- 요업의 발전

고조선의 유적들에서는 돌림판을 써서 만들고 밀페가마에서 환원불꽃을 리용하여 구워낸 각종 질그릇들이 수많이 나왔으며 또 흰색, 붉은색의 기와, 막새들이 나왔다.

- 방직수공업의 발전

고조선사람들은 다른 나라 누에와는 조상과 계보가 완전히 다른 토종석잠누에를 쳤으며 삼농사를 하여 여러가지 고운 비단천과 베를 짰다. 직조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천짜기에서는 가내수공업과 함께 직조업을 전문으로 하는 수공업도 발전하였다.

- 대내외상업의 발전

국내상업이 발전하여 류통수단으로서의 화페가 널리 쓰이였다. 대외무역도 일찌기 발전하여 중국의 여러 나라들과 무역하였다.

이렇듯 단군조선시기에 생산의 여러 분야들이 높은 수준에 이르고 그에 따라 국력은 한층 더 강화되였다.

이것은 고대선진문명국으로서의 고조선의 초기 발전모습의 일단을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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