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절 진국

 

△ 진국의 성립과 령역

진국은 우리 나라 력사에 존재한 고대국가의 하나이다.

《사기》판본중 가장 이른 판본인 남송 소흥초 항주각본 《사기집해》나 《한서》 조선렬전에서는 진국왕이 한나라 임금에게 편지를 보내여 만나볼 의향을 표명하고저 했으나 고조선의 우거왕이 가로 막아서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하였고 《위탁》에서는 고조선의 상관직에 있던 력계경이 2 000여호의 주민을 거느리고 진국에 망명하였다고 하였으며 《후한서》한전에서는 삼한지역에 본래 진국이 있었다고 전하여 우리 나라 력사에 진국이 존재하였음을 알수 있게 한다.

- 진국의 성립

부여, 구려의 성립후 B.C. 12세기경에 중부조선이남지역에서 진국이 또 하나의 고대국가로 등장하였다.

진국이 성립되기 이전 시기인 단군조선의 강성기에 중부조선이남지역은 단군조선의 후국으로 되여있었다.

중부조선이남지역주민들의 생활에서는 B.C. 3000년기 후반기에 이르러 큰 변화가 일어났다. 즉 이 지역에서는 원시사회가 무너지고 계급사회로 이행하고있었으며 그 과정에 새로운 노예소유자적정치세력이 여러곳에 형성되였다.

새로 출현한 정치세력가운데서 특권적지위에 있던 성원의 주요구성은 중부조선이남지역으로 남하한 단군조선의 노예주계층들이였다. 평양일대에서 흔히 볼수 있는 고인돌무덤이 B.C. 3000년기 중엽경에 중부조선이남지역에 널리 퍼져 당시 이 지역의 묘제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며 팽이그릇 등이 중부조선이남지역에서 일정한 비중을 차지하게 되였다. 이것은 단군조선의 노예소유자계층주민집단이 남하와 관련되여있었다.

단군조선에서 남하한 세력들은 소국들을 형성하고 단군조선의 후국 또는 속령으로 전환되였다. 이러한 통합과정은 대체로 B.C. 3000년기 후반기에 이루어졌다.

단군조선에 통합된 이후 중부조선이남지역에서의 사회발전은 더욱 촉진되고 점차 후국들의 력량이 자라 새로운 정치적주도세력들로 나타나게 되였다. 오덕형고인돌에 맞먹는 바둑판식고인돌무덤의 출현은 그 일단을 보여준다.

전라북도 고창군 아산면 상감리에는 뚜껑돌의 크기가 동서 6.5m, 남북 5.3m, 높이 2m에 달하는 엄청나게 큰 바둑판식고인돌무덤이 있다. 이 거대한 뚜껑돌은 무덤칸을 보호하기 위한것이라기보다 무덤에 묻힌 자의 위력을 과시하기 위한것이였다. 이러한 큰 바둑판식고인돌무덤의 주변에는 의례히 수많은 고인돌무덤들이 큰 고인돌무덤을 옹호하듯 에워싸고있다.

후국들 특히 주도세력의 급속한 장성은 고조선으로부터의 분립과정을 촉진하는 주되는 요인으로 되였다.

큰 세력으로 자라난 후국들은 단군조선과 후조선교체시기에 고조선으로부터 떨어져나왔다. 분립된 세력은 《한》이라고 불리웠는데 그중 가장 크고 강한 주도세력은 남한강(금강류역)과 그 주변일대에서 형성된 마한이였다. 마한은 자기세력을 급속히 확대하면서 점차 다른 주도세력인 진한과 변한을 통합하여 하나의 통일적인 고대국가 진국을 이루었다.

- 진국의 령역

진국은 례성강을 경계로 북쪽의 고조선(후조선)과 접하고있었다.

 

 

진국의 령역

 

북쪽경계는 시기에 따라 일정한 변화가 있었으나 말기의 북쪽경계는 패하(례성강)였다.

그리고 동쪽과 서쪽은 바다에 면해있었고 남쪽은 바다를 사이에 두고 왜와 이웃하고있었다.

《삼국지》 한전에 의하면 진국을 이루고있던 삼한가운데서 마한은 서쪽에 있었고 진한은 마한의 동쪽에 있었으며 변한(변진)은 진한의 남쪽에 있었다고 한다.

마한, 진한, 변한의 접경지역은 명백치 않으나 마한은 대체로 오늘의 경기도, 충청남북도, 전라남북도지역, 진한은 락동강동쪽의 경상남북도지역과 강원도의 남부지역, 변한은 락동강하류서쪽을 중심으로 하여 경상남북도의 일부 지역을 각각 차지하고있었다.

진국의 수도는 《삼국지》 한전에서 전하는 월지국(《후한서》의 목지국)과 《삼국사기》 백제본기 초기기사에 전하는 마한의 국읍이였는데 월지국은 전시기의 수도였고 국읍은 말기의 수도였다.

월지국은 백제시기에 《위례성》으로 불렀던 성으로서 오늘의 직산일대에 있었고 마한의 국읍은 《고려사》나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서 전하는바와 같이 금마군(금마저) 즉 오늘의 전라북도 익산일대에 있었다.

△ 진국의 통치체제, 생산의 발전

- 통치체제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과거에는 인민을 억압하는 소수 통치배들이 인민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우로부터 강제로 정권을 만들었기때문에 그것은 항상 반인민적이며 관료적인 정권이였습니다.》 

진국의 정권은 소수 통치배들이 노예를 비롯한 피압박대중을 억압착취하기 위하여 만들어낸 반인민적이며 관료적인 정권이였으며 통치체제는 그에 맞게 꾸려져있었다.

진국은 전체로서 하나의 큰 노예소유자국가였으나 그것은 마한, 변한, 진한의 삼한과 거기에 속한 소국들로 이루어져있었다. 진국의 통치배들은 이 삼한과 소국을 지배하기 위한 통치제도들을 만들어놓았으나 그것은 고조선이나 부여에 비하여 중앙집권력이 미약하였다.

일찍부터 고조선의 발전된 정치제도의 영향을 많이 받아온 진국에는 노예소유자계급의 리익을 옹호하기 위한 정연한 통치제도가 갖추어져있었다.

진국의 최고통치자를 옛 기록에서는 진왕으로 전한다.

《후한서》 한전에서는 삼한가운데서 마한이 가장 큰 세력이기때문에 모두 마한출신으로 진왕을 삼는다고 하였고 《삼국지》 한전에서는 진왕으로는 대대로 마한사람이 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옛 기록들에서는 진왕을 마한왕으로 전하기도 한다. 인구수만 보아도 마한의 총 주민호수는 10여만호나 되였으나 진한과 변한은 4만~5만호정도밖에 안되였다.

이러한 자료들은 진국을 이룬 삼한가운데서 가장 큰 세력인 마한의 왕이 진한, 변한도 지배하는 진국의 왕으로 되였다는것을 보여준다.

마한은 진왕(마한왕)의 직할지였고 진한과 변한은 그 속국이였다.

그러므로 진왕은 마한지역을 직접 통치하였고 진한, 변한은 마한출신귀족들로 임명된 한왕(진한왕, 변한왕)들을 통하여 지배하였다.

옛 기록에 의하면 마한에는 54개의 소국이 있었고 진한과 변한에는 각각 12개의 소국들이 있었는데 매 소국들의 주민호수는 최고 1만여호로부터 최하 600~700호에 이르기까지 각이하였다.

소국들의 규모에 따라 소국통치자들의 명칭에서도 신지, 험측, 변예, 살해, 읍차 등의 구별이 있었다.

이들가운데서 마한의 소국통치자들은 진왕의 직접적인 지배를 받았고 진한, 변한의 소국통치자들은 한왕들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진왕의 지배를 받았다.

매개 소국들에는 그 중심지인 국읍과 제천행사를 거행하는 신성지역으로서의 별읍(소도) 그리고 일반 주민거주지인 읍락들이 있었다.

읍락은 국읍밖의 주민거주지들을 말하는데 이 읍락들에도 우두머리가 있었다.

《소도》라고도 부르던 별읍은 하늘신에게 제사를 지내는곳이였다. 별읍은 국읍가까이에 있었다.

별읍-소도에는 큰 나무에 북을 매달아놓은것을 비롯하여 일련의 종교시설들이 있었다. 소도는 그 어떤 사람이건 일단 그 안에 들어가기만 하면 누구도 잡아내올수 없는 신성불가침한 구역이였다.

노예를 비롯한 인민들이 통치배들을 반대하여 싸우다가 몸을 피해 그 구역안으로 들어가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면 당장 붙잡혀 형벌을 받지는 않았다. 그러나 소도에 있는 신관들의 노예로 전락되여 또다시 가혹한 억압과 착취를 당하였다.

이러한 사실들은 고대의 종교시설 역시 하나의 노예제적착취소굴이였다는것을 말해주는 동시에 노예주계급이 종교를 어떻게 저들의 통치에 리용하였는가를 보여준다.

진국에는 법이 있었다.

진국의 법에 대하여서는 그것이 가혹하였다고 한 기록이 있을뿐 구체적내용을 전하는것이 없으므로 그 면모를 잘 알수는 없다. 그러나 진국의 법도 노예주계급의 리익을 옹호하기 위한 법이였다는것은 명백하다.

진국에는 노예소유자계급의 리익을 옹호하는 폭력수단인 군대가 있었다. 군대는 보병과 기병으로 구성되였으며 그중에서도 보병이 기본무력이였다. 개별적인 변방소국들에도 국가방위의 임무를 지닌 자체의 군대가 있었다.

진국의 통치배들은 이렇듯 통치기구와 법, 군대 등 통치체제전반을 부단히 정비보강하면서 노예제도를 유지옹호하였으며 노예를 비롯한 피압박인민들에 대한 노예제적인 억압과 수탈을 강화해나갔다.

- 생산의 발전

진국에서는 고조선의 경제, 문화적영향하에 일찍부터 농업, 수공업을 비롯한 생산의 모든 부문들이 빨리 발전하게 되였다.

고조선의 청동문화의 영향하에 발생발전한 진국의 청동기는 고조선으로부터 분리된후 독자적인 발전의 길에 들어섰으며 더욱 높은 수준에 이르게 되였다.

특히 진국에서 청동기와 함께 철기가 보급됨에 따라 로동도구가 개선되고 농업, 수공업을 비롯한 생산의 모든 부문들이 빨리 발전하게 되였다.

농업에서 철제농기구와 부림소의 리용은 농업생산물을 더욱 늘일수 있게 하였다. 진국에서 생산된 농작물은 벼와 밀, 보리, 콩, 조 등 여러가지 밭곡식이였다.

진국에서는 또한 야금업, 금속가공업, 직조업, 목공업, 구슬가공 및 금, 은 세공 등 여러가지 수공업이 발전하였다.

특히 B.C. 2세기의것으로 알려진 잔줄무늬거울은 그 시기 청동주조기술의 발전수준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뒤면에 새겨진 섬세한 기하학적무늬와 용도에 맞게 적절히 처리한 합금비률은 진국사람들이 높은 과학지식과 기술을 가지고있었다는것을 보여준다.

진국에서는 북쪽의 한강으로부터 남쪽의 바다가에 이르는 넓은 지역의 곳곳에서 철을 생산하여 철기를 만들어썼다. 특히 진한과 변한지역은 철생산지로 널리 알려졌으며 여기에서 생산된 철기들은 주변의 여러 나라들과 교역되였다.

직조업도 발전하여 면포, 겸포, 가는베 등 우수한 천들이 생산되였다.

또한 진국에서는 구슬가공과 금, 은 세공술도 발전하였다.

상품생산이 늘어남에 따라 국내상업이 발전하였고 시장들에서는 쇠를 화페로 사용하였다. 또한 왜와 중국의 여러 지방들과 대외무역도 활발히 진행되였다.

그러나 진국의 발전된 경제는 노예소유자계급의 리익을 위하여 복무하였으며 근로인민대중은 노예적착취와 억압에 시달렸다.

진국사회에서 주되는 경리형태는 노예소유자적경리형태였으며 이밖에 자영소농민적경리형태와 이전 사회의 유제로 원시공동체적경리형태도 일부 남아있었다.

노예들에 대한 노예소유자들의 착취, 예속지인민들에 대한 국가의 공납착취, 자영소농민들에 대한 조세수탈 등은 진국사회에서 주되는 착취방법이였다.

△ 진국의 종말

노예소유자국가인 진국에서는 그 말기에 이르러 노예소유자적경리가 점차 약화되고 새로운 봉건적생산관계가 자라나기 시작하였으며 노예제를 반대하는 노예들의 투쟁이 강화되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노예사회에서 노예들에 대한 가혹한 압박은 노예폭동을 가져왔으며 노예들의 투쟁에 의하여 노예사회는 멸망하였습니다.》  

노예소유자국가 진국내에서는 생산력의 발전과 선진 고조선, 고구려의 영향하에 점차 봉건적관계가 싹트기 시작하여 봉건소국들이 출현하였다.

진국에서 봉건적생산관계가 먼저 발생한 곳은 변방지역이였다.

마한의 북쪽지방과 진한과 변한의 일부 지역들에서는 일찌기 철기가 널리 보급되여 진국의 다른 지역들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생산력이 빨리 발전하였다. 이것은 주로 이 지역에 대한 고조선, 고구려의 선진문화의 영향과 관련된다. 그러한 문화적영향은 주민의 이주 및 교역 등에 의하여 이루어졌으며 특히 주민의 이주는 결정적요인으로 되였다. 주로 진국의 변방지역에 정착한 고조선과 고구려사람들은 일찌기 철기문화를 창조하였으며 강철(주강)을 생산하는 높은 생산력수준에 도달한 사람들이였다. 이러한 선진문화를 소유한 주민들의 이주는 이 고장에서의 생산력의 발전을 가일층 다그치게 하였다. 변방지역들에서의 생산력의 발전은 이 지역에서의 봉건화과정을 자극하고 촉진시킨 기본요인의 하나로 되였던것이다.

한편 나라의 중심부지역에 비하여 국가의 통제력이 덜 미치였던 사정은 변방지역에서의 새로운 봉건적관계의 출현에 유리한 조건으로 되였다.

이와 함께 마한의 북쪽변방 주민들은 노예주나 국가에 의한 경제적착취외에 무거운 병역부담을 지고있었으며 진한, 변한의 생산자대중은 읍락이나 소국의 통치자들에게 착취당하였을뿐아니라 진국의 공납대상자로서 생산물의 적지 않은 부분을 수탈당하였다.

이처럼 진국의 변방지역 주민들은 2중3중의 가혹한 착취를 당하여 생활처지가 매우 어려운 형편에 놓이게 되였는데 이것은 그들로 하여금 노예제적경리형태를 반대하고 새로운 봉건적생산관계를 쉽게 받아들일수 있게 하였다.

이러한 주객관적요인들에 의하여 마한의 북쪽변방에서는 B.C. 3세기 중엽에 고구려로부터 이주해온 온조집단에 의하여 백제봉건소국이 출현하게 되였으며 진한의 경주지역에서는 고조선계통이주민들이 중심이 되여 B.C. 1세기 초중엽에 사로봉건소국이, 변한지역에는 가야봉건소국이 형성되였다.

한편 진국 중앙정권의 통제력이 강하게 미치였고 노예제적관계가 완고하게 유지되고있던 대부분지역들에서는 노예주들의 늘어나는 치부욕으로 하여 노예들에 대한 착취와 억압이 더욱 강화되였으며 그에 따라 노예제적업압과 착취를 반대하는 노예들의 투쟁도 증대되였다.

그리하여 노예들은 자주 집단적폭동을 일으키거나 멀리로 도망침으로써 노예소유자들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노예들이 자주 집단적으로 또는 개별적으로 도망하거나 일을 태공하며 지어 폭력투쟁을 벌리게 됨에 따라 생산이 점차 줄어들게 되였으며 노예소유자적경리는 내리막길을 걷게 되였다.

봉건소국들의 출현과 그 세력확장은 지방분권화를 더욱 강화하게 하였으며 그것은 진국의 통치체제를 급속히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처음에는 진한, 변한이 마한의 지배에서 떨어져나왔고 마한안에서도 백제소국이 강력한 세력으로 마한왕권을 위협하였다.

주변소국들을 통합하여 상대적으로 큰 세력으로 자라난 백제국은 말갈, 락랑을 반대하는 전쟁에서 단련된 강력한 군사력에 의거하여 아직은 상대적으로 힘이 약하였던 조건에서 백제국의 통치층은 겉으로는 마한왕에 대한 종래의 신속관계를 그대로 유지하는척 하면서 장차 진한과 마한을 병합할 욕망을 실현하기 위하여 자체의 힘을 키워나갔다.

백제가 응천(금강)북쪽의 마한지역을 차지하였을 당시를 전후하여 마한은 더욱 약해지고 통치층안에서 특히 왕과 관리들사이에 알륵과 모순이 더욱 격화되였다. 이것은 마한왕조를 멸망에로 이끌어갔다.

이러한 조건에서 백제는 A.D. 8년 겨울에 사냥을 하려 간다는 구실로 수많은 군사들을 출동시켜 마한에 대한 결정적공격을 들이대여 마침내 마한 후기의 국읍(진국의 수도)인 익산을 차지하고 마한왕조를 멸망시켰다.

백제에 의한 마한왕조의 멸망으로 조선반도중남부지역에서 천수백년동안 존재한 진국은 종말을 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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