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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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편 원시 및 고대사회
제1장 원시사회
제2절 씨족공동체사회
1. 모계씨족공동체사회

 

△ 초기모계씨족사회

씨족은 구석기시대 후기(5만년전~9000년전)에 발생하였다.

ㅡ 우리 선조들은 구석기시대 후기에 이르러 몸구조에서 현대인과 같은 체모를 갖추게 되였다.  즉 고인으로부터 신인으로 이행하였다.

신인은 인류진화발전과정에서 마지막단계의 사람으로서 현대사람과 같은 범주에 속하는 사람이다. 신인은 고인에 비하여 뇌수의 크기가 현저히 늘어났고 이마와 턱이 완전히 갖추어졌으며 팔다리도 로동에 더욱 편리하게 발전하여 현대사람과 같은 몸모양을 갖추게 되였다.

신인에게서 가장 특징적인것은 뇌수가 발달한것이다. 신인의 뇌수에는 언어활동을 주관하는 부위와 흥분 및 제지를 조절하는 부위가 잘 발달되여있다.

우리 나라의 여러곳에서 신인들의 뼈화석이 발견되였는데 거기에서 발굴된 신인화석들은 몸구조상특성에서 오늘의 조선사람과 공통성이 있는 반면에 같은 시기 다른 지역의 신인들과는 뚜렷한 차이가 있다. 이러한것은 조선사람의 원형이 이미 이 시기에 형성되였다는 사실을 보여주는것이다.

대표적유적:

• 황해북도 승호군 만달리유적(동굴)

20~30살정도 되는 남자의 아래턱뼈, 골반뼈, 팔뼈, 넙적다리뼈가 나옴.  《만달사람》

• 황해북도 상원군 룡곡리유적(동굴)

완전한 형태의 두개골 여러개체분이 나옴.   《룡곡사람》

• 평안남도 덕천시 승리산유적 웃층(동굴)

35살정도되는 남자의 아래턱뼈    《승리산사람》

ㅡ 신인들은 원시무리단계에서 벗어나 씨족을 이루었다.

씨족은 피줄기에 의하여 무어진 원시인들의 사회적집단으로서 원시무리보다 훨씬 공고한 집단이였다.

씨족의 발생요인:

• 사람들이 원시무리보다 공고한 사회적집단을 뭇고 생산활동과 일상생활을 벌려나갈것을 지향한것

• 당시 사람들에게 종래보다 공고한 사회적집단을 움직일만한 창조적능력이 마련되게 된것

즉 사람들의 의식수준이 높아지고 창조적능력이 높아지면서 집단을 보다 효과적으로, 통일적으로 움직일수 있는 능력이 자라나게 되였다.

ㅡ 사람들이 최초에 형성한 씨족은 모계씨족이였다.

인류사회는 원시무리시기로부터 모계씨족사회로 발전하였는데 우리 나라에서 모계씨족사회는 대체로 구석기시대 후기부터 신석기시대를 포괄한다.

모계씨족공동체사회의 특징은 씨족동동체의 집단생활을 운영하는 사회적기능을 녀자가 담당수행하였다는데 있다.

그것은 당시 사람들의 생산활동과 생활에서 녀성들의 지위와 역할이 남자들보다 높았기때문이였다.

녀성들의 지위와 역할이 남자들보다 높았다는것은 우선 녀자가 집단의 살림을 꾸려나가는 일을 맡아서 수행한데서 찾아볼수 있다.

생산활동에서 남자는 주로 사냥을 진행하였는데 매우 불안정하였으며 소득도 일정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녀자들이 진행하는 채집은 남자들이 진행하는 사냥보다 소득이 비교적 공고하였으며 생활상측면에서도 아이를 낳는 일, 불보관, 살림살이 등을 맡아하였다.

또한 매개 씨족은 녀자들이 낳은 자손들로 이루어져있으며 아버지는 한 씨족의 켠에서 본다면 항상 다른 씨족에 속하는 《손님》이였다. 따라서 어느 씨족에서나 군혼이 지배하는 조건에서 피줄기는 어머니켠으로만 따질수 있었으며 녀성들은 자연히 씨족성원들의 존경을 받으며 남성들보다 권위가 높게 되였다.

─ 씨족의 조직과 운영

씨족은 당시 사람들의 사회생활의 기본단위였다.

당시 사람들은 씨족을 기본단위로 하여 생산수단과 생산물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소비하였으며 공동로동을 하면서 평등한 관계에 기초한 집단생활을 하였다.

씨족사회에서는 씨족을 운영하기 위한 일정한 조직이 있었다.

그러한 조직으로서 씨족평의회가 있었다.

씨족평의회는 씨족성원전체가 참가하여 씨족의 중요한 문제들(생산, 제사, 기타)을 토의하였다.

씨족의 우두머리를 씨족장 또는 군장이라고 불렀는데 그들은 씨족평의회에서 선출, 파면(소환)되였으며 세습적인 특권층이 아니였다.

씨족은 자기의 고유한 이름을 가지고있었다.

대체로 곰, 범 등 동물의 이름을 본딴것인데 또뗌과 관련한것들이였다.

씨족의 이러한 조직과 운영은 구석기시대 후기 모계씨족단계에서만이 아니라 씨족공동체사회 전기간 유지되였다.

씨족은 원시무리보다 훨씬 째이고 공고한 집단이였다.

구석기시대 후기 신인들은 이러한 씨족집단의 힘으로 자연의 구속에서 벗어나기 위한 투쟁을 벌려 새로운 전진을 이룩하였다.

이렇듯 모계씨족공동체는 집단생활과 공동로동을 조직하고 지휘하는 사회적기능에 의하여 생활이 운영되여나가는 견고하고도 째인 사회적집단이였다.

ㅡ 초기모계씨족사회에서는 로동도구가 개선되고 생산활동이 더욱 확대되였다.

구석기시대 후기의 신인들은 로동도구를 만드는데서 현저한 발전을 이룩하였다.

굴포문화2기층과 부포리유적에서는 4만~3만년전의것으로 인정되는 석기들이 나왔고 만달리유적과 석장리유적에서는 대략 3만~2만년전경의 석기와 뼈도구들이 나왔다.

 

 로동도구와 조각품들

 

유적들에서 나온 석기들로는 찍개, 긁개, 찌르개, 밀개, 새기개 등이 있다.

이 시기 사람들은 석기를 만드는데서 새로 《대고떼기》와 《눌러떼기》의 수법을 창안하여 널리 적용하였다.

신인들의 로동도구제작에서 특이한 점은 구조가 비교적 복잡한 조립식도구가 출현한것이다.

신인들이 만든 작살이나 투창같은것은 모두 자루를 결합시켜 쓴것으로서 이전에 비하여 능률적이였다.

대표적유적으로 황해북도 승호군 만달리유적과 충청북도 제천시 송학면 포전리 점말동굴 4층을 비롯하여 여러 유적들에서 나온 짐승의 뼈나 뿔로 만든 창끝, 작살, 투창, 바늘 등을 들수 있다.

신인들은 이렇게 개선된 로동도구와 일정하게 축적된 자연에 대한 지식 및 로동경험에 의거하여 생산활동을 넓혀나갔다.

그들은 채집과 함께 짐승사냥을 이전보다 더 활발히 벌렸으며 물고기도 잡아먹었다.

구석기시대 후기에 이르러 사람들은 한곳에 자리를 잡고 정착생활을 하게 되였다.

이 시기 사람들은 옷을 해입고 움집을 짓고 살았다.

 

 움집

 

이처럼 로동도구가 발전하고 로동경험이 축적되였으며 씨족이 단합되면서 사회적생산은 늘어나고 사람들의 생활은 훨씬 개선되였다.

ㅡ 중석기시대에 들어서면서 활과 화살도 발명되였다.

중석기시대는 구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의 중간에 해당되는 1만 5000년전부터 9000년이전까지의 시기이다.

중석기시대는 아직 타제석기가 로동도구에서 기본을 이룬 시기였으므로 석기시대를 구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로 크게 나눌 때에는 구석기시대에 포함시킨다.

중석기시대의 특징은 세석기가 널리 보급된것이다.

세석기들은 보통길이가 5㎝미만의 자그마한 격지 및 쪼각인데 그 가운데는 날부분을 눌러뜯기수법으로 잘 다듬은것들이 많다.

이런 세석기들은 활촉이나 칼, 창끝 등으로 리용하였다.

중석기시대의 중요한 특징의 다른 하나는 활과 화살이 발명되여 보급된것이다. 이것은 원시시대기술발전에서 커다란 변혁이였다.

△ 발전된 모계씨족사회

ㅡ 이 시기 조선옛류형사람이 형성되였다.

인류는 신석기시대에 들어서면서 오랜 발전과정에 이루어진 고유한 유전학적계승성과 일정한 지역을 포괄하는 문화적공통성 등에 의하여 제가끔 하나의 인류학적류형으로 묶어지게 되였다.

고유한 인종으로서의 조선사람의 시초형이 형성되는 과정은 오랜 력사적시기를 거쳐 한 갈래의 피줄이 이어지고 우리 나라 지역에 고착되여 대를 이어 살아오면서 문화적공통성이 이루어진 결과였다.

구석기시대 후기의 문화를 창조한 이른 시기의 신인인 《룡곡사람》, 《승리산사람》은 늦은 시기의 신인인 《만달사람》, 《풍곡사람》을 거쳐 신석기시대에 이르러 현대조선사람의 직계선조로 이행하였다.

신인에 근원을 둔 조선사람의 직접적인 선조를 현대조선사람과 구별하여 《조선옛류형사람》이라고 부른다.

 

 

조선옛류형사람

 

대표적유적으로는 평양시 강동군 강동읍 림경산 동남쪽기슭의 동굴유적에서 나온 키가 약 160㎝정도 되는 성인남자의 머리뼈, 몸통뼈, 팔다리뼈 등을 들수 있다.

《조선옛류형사람》들은 자기의 고유한 인종적특징을 가지며 동북아시아의 이웃 주민들과 본질적으로 구별된다.

《조선옛류형사람》들은 머리가 짧고 높으며 이마는 곧고 그 너비는 중간정도로 넓다. 또한 얼굴은 광대뼈가 약간 두드러지고 얼마간 넙적한 중간형이고 턱은 우무러든 형이다. 그리고 코는 중간정도로 크고 눈확은 높다.

이처럼 인류발생의 첫 시기부터 평양일대에서 조선사람의 조상들이 대를 이어 줄곧 생활한 흔적과 그 뼈화석들이 계통적으로 발견되는것은 평양이 아득한 옛날부터 인류문화의 발상지의 하나라는것을 뚜렷이 보여주며 조선사람이 오랜 력사적시기를 두고 하나의 피줄을 이어온 단일한 민족이라는것을 명백히 알수 있게 한다.

ㅡ 이 시기에 신석기시대가 시작되고 로동도구가 현저히 개선되였다.

《조선옛류형사람》들은 오랜 기간에 걸친 로동과정에 축적된 경험에 기초하여 돌을 깨뜨리는 방법으로써가 아니라 갈아서 매끈하고 쓸모있는 도구 즉 마제석기를 만들어쓰게 되였다.

또한 생활에서 커다란 의의를 가지는 질그릇을 만들어씀으로써 새로운 문명을 낳게 하였다.

 

질그릇만들기

 

이와 같이 마제석기와 함께 질그릇을 만들어쓰던 때로부터 청동기를 만들어 쓰기전까지의 시기를 신석기시대라고 한다.

신석기시대에 이르러 문화발전에서는 지역적차이가 생기긴 하였지만 평양을 중심으로 한 대동강류역일대에서 신석기시대는 B.C. 7000년기부터 B.C. 4000년기 전반기까지 존속하였다.

우리 나라 지역에서 발견된 대표적인 유적들로서는 평안남도 온천군 운하리 궁산유적, 평양시 사동구역 금탄리유적, 평양시 삼석구역 호남리 남경유적, 황해북도 봉산군 지탑리유적, 서울시 암사동유적 등을 들수 있다.

신석기시대에 이르러 마제석기제작수법을 비롯한 여러가지 석기제작수법들이 도입되여 도끼나 괭이, 화살과 창끝 등 용도에 따라 다양한 석기들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이 시기에 질그릇을 만들어 리용함으로써 물질문화생활이 개선되게 되였다.

ㅡ 신석기시대 사람들은 생산활동도 더욱 확대하였다.

신석기시대 사람들은 항구적인 정착생활을 하면서 원시적인 농업과 집짐승기르기, 사냥, 물고기잡이 등을 하였고 원시적인 수공업도 진행하였다.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서포항유적, 궁산유적을 들수 있다.

 

궁산유적과 로동도구들

 

이 유적들에서는 땅 혹은 조개무지를 일정한 깊이로 파고 지은 움집과 원시농업에 필요한 뿔괭이, 돌괭이, 뚜지개 등이 발견되였으며 중석기시대에 시작되고 신석기시대에 본격적으로 진행된 집짐승기르기와 관련한 유물, 짐승사냥과 물고기잡이에 쓰인 돌활촉, 뼈활촉, 그물추, 작살, 낚시 등도 많이 발견되였다.

또한 원시적인 수공업을 진행한 자료로서 로동도구, 질그릇, 실낳이에 필요한 베실, 가락바퀴, 바늘 등도 나왔다.

특히 신석기시대에 질그릇에서 새김무늬를 기본으로 하는 고유한 문화갖춤새가 모든 유적들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고있는것은 우리 나라 신석기시대 주민들이 문화적으로 공통한 관계에 있었으며 같은 피줄을 이은 주민들이였다는것을 반영하는것이다.

ㅡ  이 시기에 모계씨족제도는 더욱 발전하였다.

신석기시대 《조선옛류형사람》들의 사회관계에서 기본으로 된것은 원시적인 집단생활과 집단생산활동, 생산수단에 대한 공동소유, 생산물에 대한 균등분배에 기초한 공동체적관계였다.

항구적인 정착생활로 원시적인 농업과 질그릇만들기, 실낳이를 비롯한 수공업의 직접적담당자는 녀성들이였으므로 그들의 사회적지위는 높았다.

그리하여 신석기시대에 씨족은 모계씨족으로 더욱 발전하게 되였다.

이 시기에 또한 씨족조직이 더 강화되고 그 사회적기능도 높아졌다.

씨족에는 최고기관으로서 씨족안의 모든 성원들이 참가하는 씨족평의회가 있었는데 여기서는 생산활동, 제사, 씨족의 방위 및 기타 씨족앞에 제기되는 중요한 문제를 토의결정하였다.

석기시대에 생산력이 발전하고 주민이 차츰 늘어나면서 씨족의 구성과 조직이 더 째이고 풍부해졌으며 사람들의 거주지역도 훨씬 더 넓어졌다.

그리하여 모계씨족공동체시기에 사람들은 씨족, 대씨족, 종족 등에 뭉쳐 생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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