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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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편 조선봉건사회
제4장 조선봉건왕조
제7절 자본주의적관계의 발생발전, 1811년-1812년 평안도농민전쟁, 1862년전국농민폭동
1. 봉건적신분제도의 점차적분해, 봉건통치의 위기

 

△ 봉건적신분제도의 점차적분해

봉건사회에서 피압박인민들은 사회적예속을 반대하는 투쟁을 완강하게 벌려왔다.

저주로운 신분적예속의 멍에에서 벗어나기 위한 인민들의 줄기찬 투쟁과 상품화페경제의 발전으로 오랜 세월을 두고 굳어졌던 봉건적신분제도도 조선봉건왕조 후반기이후 점차 분해되는 길에 들어서게 되였다.

또한 상품화페경제의 발전도 봉건적신분제도를 분해시키는데 커다란 작용을 하였다.

- 봉건적신분제도의 점차적분해는 노비제도상에서 제일 뚜렷이 나타났다.

봉건적신분제도를 반대하는 노비신분인민들의 힘찬 투쟁은 노비신분제도를 크게 뒤흔들어 놓았으며 그 파동속에서 중요한 변화들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 봉건통치배들은 노비들의 항거에 못이겨 노비세전에 관한 극악한 규정을 일부 고치지않을수 없었다.

원래 노비법에는 부모들가운데 어느 한사람이라도 노비인 경우에는 그 자손들이 모두 노비로 되여야 한다는것으로 밝혀져있었다. 그러나 1731년에 봉건정부는 이 《종부수모법》을 고쳐 아들은 아버지, 딸은 어머니의 신분을 따르게 함으로써 부모중의 어느 누가 량인이면 아들딸중의 하나는 량인으로 되게 하였다.

또한 재산을 모은 노비들이 《몸값》을 물고 량인으로 되는 현상(속신)도 18세기 이후에 급격히 늘어났다. 어디에서나 노비의 속신이 보편적인 현상으로 되였다는 사실은 노비의 신분적지위가 그만큼 높아졌다는것을 보여주며 그것은 노비와 량인의 계선이 점차 흐려지게 되였다는것을 의미한다.

▫ 노비제도상에서의 변화는 공노비신공의 부단한 감소에서도 뚜렷이 나타났다.

봉건정부는 노비신공(신포)의 수탈을 반대하는 노비신분인민들의 투쟁에 질겁하여 여러차례에 걸쳐 신공법을 개정하지않을수 없었다.

봉건정부는 이미 1667년에 공노비의 신공을 반필씩 줄이는 조치를 취하였으며 1755년에는 다시 반필씩 줄이고 1774년에는 관청과 역참에 속한 녀자종의 신공을 페지한다는것을 선포하였다.

이리하여 노(남자노비)들이 지는 1인당 노공액수는 량인들이 지는 군포액수(1필)와 균일하게 되였으며 1774년에는 량인녀성들에게 신역을 지우지않는것처럼 비(녀자노비)들의 신공도 면제하게 되였다.

이것은 노비들이 봉건국가의 역을 지는데서 량인들과 별로 다를바 없게 되였다는것을 의미하며 량인과 노비의 신분적차이도 점차 흐려져가고있었다는것을 보여준다.

봉건통치배들은 노비신분인민들의 완강한 투쟁앞에서 이전의 신포법개정과 같은 노비들의 부담을 얼마간 낮추는 그러한 소극적인 조치가 아니라 더 나아가 노비신분제도 그 자체를 일정하게 고치지않을수 없는 단계에 이르렀다.

▫ 바로 이러한 환경속에서 봉건정부는 1801년에 적지않은 공노비들을 《방량》시키지않을수 없었다.

봉건정부는 《방량》의 대상으로 공노비를 택하였는데 그것은 이 무렵에 이르러 공노비제도가 실제상 거의 무너지다싶이 되여있었으며 공노비를 량인으로 만든다 하더라도 저들에게 손해될것이 없다는 타산으로부터 출발한것이였다.

봉건정부는 차라리 국가의 공노비나마 먼저 《해방》하여 량인으로 만듦으로써 정부의 수입을 늘이는 동시에 《왕의 어진 정치》에 대하여 떠들어대고 노비들의 투쟁을 무마하는 편이 훨씬 낫다고 인정하였던것이다.

그리하여 봉건정부는 1801년 1월에 2만 9 000여명의 공노비와 약 3만 7 000명의 궁노비의 명단을 왕궁앞에서 불사르고 왕의 이름으로 《방량》을 선포하였다.

▫ 그러나 봉건통치배들이 실시한 《방량》은 매우 불철저한것이였다.

이때 실시된 《방량》은 노비전체에 해당한것이 아니라 공노비의 《해방》이며 봉건량반들이 부려먹던 사노비의 《방량》에 대하여서는 생각조차 하지않았다.

《방량》된 공노비도 비록 신분명목은 달라졌으나 생활처지에서는 나아진것이 없었다.

1801년의 《방량》은 비록 불철저한것이였으나 그것은 노비제도를 문란약화시킨 하나의 중요한 전환점으로 되였다.

- 이 시기 량인신분층에서도 일정한 변화가 일어나고있었다.

18세기 량인들에게서 가장 무거운 부담은 군포였다.

이것은 가난한 량인농민들에게 있어서 도저히 견딜수 없는 무거운 부담이였으며 따라서 그들은 군포수탈을 반대하여 완강하게 싸웠다.

이리하여 봉건통치배들은 군포수탈을 반대하는 량인들의 투쟁을 무마할 목적으로 1750년에 이른바 《균역법》이라는것을 실시하였다.

《균역법》은 종래에 량인 한사람에게 2필씩 수탈하던 군포를 1필로 줄이고 줄인량은 다른 방법으로 메꾸는것이였다. 

이처럼 봉건통치배들의 《양보》는 매우 음흉하고 교활한것이였으며 《균역법》은 결국 군포수탈을 반대하는 인민들의 투쟁기세를 눅잦히면서도 착취량을 최대한으로 보장하기 위하여 꾸며놓은 새로운 반동적인 착취제도였다.

- 봉건적신분제도는 이밖에 다른 고리에서도 점차 흔들리고있었다.

▫ 이 시기에 상품화페경제가 발전함에 따라 봉건적토지소유관계에서의 신분적속성이 점차 약화되여가고 상인지주층이 더욱 늘어나고있었다.

이 상인지주들과 상업자본가들속에서는 족보를 위조하거나 량반과 혼인관계를 맺고 량반행세를 하는자들이 생겨났으며 지어 돈의 힘으로 벼슬까지 얻는자들이 있었다.

돈의 힘에 의하여 량반으로 자처하는자들의 수가 늘어나면 날수록 량반신분의 특권적지위는 그만큼 흐려져갔다.

▫ 한편 이 시기에 오래동안 량반들속에서 엄격히 실시되여온 적서의 차별과 지방차별을 없애자는 주장이 더욱 강하게 울려나왔다.

그리하여 봉건정부는 18세기 말에 적서의 차별을 약화시켜 서자출신도 일정한 벼슬에 등용한다는 이른바 《서얼허통》에 대한 규정을 봉건국가의 법전인 《대전통편》에 박아넣지않을수 없었다.

그리고 그때까지 극도로 차별해오던 서북지방출신량반들을 좀더 높은 관료로 등용하겠다는 이른바 《서북인수용》문제를 들고나오지않을수 없었다.

물론 《서얼허통》과 《서북인수용》에 관한 규정들이 제대로 집행되지는 않았으나 그러한 규정들이 나오게 되였다는것은 량반들내부에 존재해온 여러가지 세분된 신분적차이들이 일정하게 흐려져가고있었다는것을 말해준다.

봉건적신분제도에서의 이러한 변화들은 당시 사회에서 신분보다도 돈이 점차 판을 치면서 봉건제도가 전반적으로 흔들리고 금이 가고있었던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봉건통치배들은 귀천의 차이와 상하의 구별이 없는 《무질서》한 시기가 다가왔다고 아우성쳤으나 실제에 있어서는 그 《무질서》속에서 사회는 점차적으로 발전하고있었다.

△ 봉건통치질서의 문란

- 18~19세기에 이르러 봉건통치질서는 걷잡을수 없이 헝클어지고 문란해져 심각한 위기에 빠져들고있었다.

이 시기 봉건적인 억압과 착취를 반대하고 자주성을 옹호하기 위한 인민들의 투쟁기세가 날로 고조되고있었다. 인민들의 드높은 투쟁기세와 여러가지 형태의 투쟁들은 봉건국가, 봉건제도를 점차 위기에로 몰아가고있었다.

한편 16세기부터 계속되여오는 봉건지배계급내부의 당파싸움은 다른 의미에서 봉건왕실을 불안속에 잠기게 하였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리조시기의 당쟁은 오래동안 계속된 파벌싸움이였던것만큼 그것이 진행된 과정은 복잡하였으며 사회발전에 끼친 후과가 대단히 컸습니다.》

당파싸움이 17세기에는 주로 서인파와 남인파사이에 치렬하게 벌어졌다면 18세기에는 서인파안에서 다시 분렬된 로론파와 소론파사이에 벌어졌다.

17세기 중엽이후에는 당파싸움이 국왕이 죽었을때 입는 상복문제와 관련된 이른바 《례론》문제를 둘러싸고 일어났는데 18세기에는 왕위계승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졌다.

당파싸움이 격화되면서 1728년 남인파가 로론파를 반대하는 《무신란》이라고 부르는 큰 규모의 류혈적인 무장반란까지 일으켰으며 1752년에는 국왕 영조로 하여금 자기 아들 장헌세자를 뒤주속에 가두어 굶겨죽이게 하는 궁중참변까지 빚어내게 하였다.

당파싸움이 오래동안 계속되고 날로 더욱 심해지면서 그것은 곧 봉건왕실에 큰 위험으로 되였으며 봉건국가자체의 존속에도 큰 위험으로 되였다.

- 봉건통치층은 봉건제도와 봉건국가를 위기에서 벗어나게 하려면 왕권강화를 위한 실질적인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인정하였다.

18세기 중엽이후 국왕 영조는 당파싸움을 없애야 한다는 이른바 《탕평》정책을 적극 내세웠으나 효과는 별로 없고 당파싸움은 여전히 계속되여 봉건왕실을 극도의 불안속에 몰아넣었다.

이러한 봉건통치제도의 위기를 반영하여 19세기 초에 세도정치라는것이 시작되였는데 그것은 그후 봉건통치질서를 더욱 문란시키고 그 위기를 극도로 첨예화시켰다.

세도정치는 개인 또는 특정한 문벌량반들이 정권을 독차지하고 전횡을 부리면서 독판치는 극단한 배타주의적문벌정치였다.

▫ 1776년에 영조의 손자인 정조가 어린 나이에 왕이 되였다.

정조는 당쟁의 소용돌이속에서 왕자리를 《안전》하게 유지할 생각으로 자기가 신임하던 신하 홍국영에게 전권을 맡겨버렸다.

이리하여 로론파출신의 외척권신들이 쫓겨나고 모든 권력은 홍국영의 손안에 집중되였다. 이로부터 《세도정치》가 시작되였다.

▫ 1800년에 어린 순조가 왕자리에 오르게 되면서 정조의 유언으로 김조순이 왕을 돕게 되였다.

이 기회를 리용하여 김조순은 자기의 딸을 순조의 왕비로 만들었으며 모든 권력을 틀어쥐였다.

이 안동김가일족들이 서울 장동에 살았으므로 그들의 세도정치를 《장동김가의 세도》또는 《안동김가의 세도》라고 한다.

1827년에 순조가 허약하여 세자(순조의 아들 의종)가 국왕대리를 하게 되자 세자의 장인인 조만영을 비롯한 풍양조가의 세력이 득세하였다.

그러나 풍양조가세력의 세도정치는 오래가지못하고 권력은 다시 안동김가에게 집중되였다.

세도를 잡은 안동김가의 족속들은 온갖 전횡을 다 부리고 국왕정치를 더욱 약화시켰으며 거기에 반대파숙청을 지독하게 벌림으로써 봉건통치질서를 극도로 문란하게 하였다.

세도량반들의 부패타락으로 벼슬자리를 팔고 사는 매관매직이 성행하였으며 봉건적인 압박과 착취를 무한대로 증대시켜 인민들의 생활은 더욱더 도탄속에 빠져들어갔다.

또한 그것은 나라의 방위력을 약화시키는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였다.

신식무장을 갖춘 유미자본주의침략자들이 우리 나라를 호시탐탐 노리면서 밀려오고있던 긴박한 시기에 이처럼 나라를 거의 무방비상태에 빠지게 한것은 세도정치가 낳은 또 하나의 엄중한 죄악이였다.

이상에서 본것처럼 세도정치는 결국 봉건사회의 내부모순들을 격화시켰으며 세도정치의 강행과 더불어 봉건제도, 봉건국가는 헤여날수 없는 궁지에 더욱 깊숙이 빠져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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