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미제의 《두개 조선》정책과 그 실현책동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미제국주의자들은 공화국북반부를 침략하여 전조선을 저들의 식민지로 만들려는 야망이 실현될수 없게 되자 남조선만이라도 계속 그러쥐고있으려는 음흉한 목적에서 <두개 조선>정책을 들고나왔습니다.》

미제는 1960년대 말~1970년대 초부터 종래의 새로운 전쟁도발의 방법으로 전조선을 식민지화하려는 대조선정책으로부터 조선의 분렬상태를 유지고착시키고 그것을 국내외적으로 공인시키는 새로운 대조선정책으로 이행하였다.

태평양전쟁시기부터 미제의 대조선정책에서는 몇차례의 변화가 있었다. 그것은 《국제적신탁통치》를 실현하는 방법으로 전조선을 식민지화할데 대한 정책(1942.~1947. 9.)으로부터 무력침공, 전쟁의 방법으로 전조선의 식민지화를 실현할데 대한 정책(1947. 9.~1969.)으로, 1960년대 말~1970년대 초에 이르러 《두개 조선》정책으로 넘어간것이였다.

 

《두개 조선》정책의 침략적본질과 목적

- 미제가 《두개 조선》정책을 들고나오게 된것은 이 시기에 이르러 당장에는 무력침공의 방법으로 전조선식민지화를 실현할수 없다는것을 자인하지 않을수 없게 되였기때문이다.

그 근거는

○ 이 시기에 미제가 정치, 경제, 군사 등 모든 분야에 걸쳐 대내외적으로 심각한 궁지에 빠지게 된데 있다.

• 군사적측면에서 미제의 《강대성》의 신화가 여지없이 깨여지고 패배의 일로를 걷게 되였다.

정전직후부터 전쟁준비를 발광적으로 다그쳐온 미제는 1960년대에 제2의 조선전쟁을 일으키려고 《푸에블로》호사건, 《EC-121》대형간첩비행기사건과 같은 큰 도발사건을 련이어 일으켰지만 그때마다 우리 공화국의 군사적위력앞에 무릎을 끓고 사죄하였다. 또한 방대한 병력과 군사장비, 막대한 군사비를 쏟아부은 윁남전쟁에서도 심각한 패배의 구렁텅이에 빠지게 되였다. 닉슨자신도 《제2차 세계대전후 미국은 두개의 큰 전쟁에 직접 개입하여 조선에서 싸우고 윁남에서 싸웠다. 이 두 전쟁에서 방대한 전쟁비용과 무기, 병력의 대부분을 들이밀었으나 25만명이 넘는 부상자와 50만명이 넘는 전사자를 내였을뿐》이며 《이러한 조건에서 장기적으로 해외에 물자와 인원을 투입해야 하겠는가 하는것을 통감하지 않을수 없다.》고 저들의 궁지에 빠진 처지를 인정하였다.

• 정치적면에서 미제의 발광적인 전쟁도발정책은 국내외적으로 지배층과 동맹국들의 강력한 비난과 반발을 면치 못하고있었다.

• 경제적측면에서도 미제는 제2차 세계대전이후 가장 심각한 위기에 빠졌다.

군사비의 증대로 미국의 금보유량은 1940년대 말의 264억US$로부터 1972년에는 97억US$로 떨어지고 $가치가 폭락하였다. 결국 미국에서 경제적침체와 위기가 격화되고 일본, 서부도이췰란드(당시)를 비롯한 다른 자본주의나라들보다 경제장성에서 뒤떨어지게 되였다.

○ 이 시기에 이르러 미제가 남조선괴뢰들의 《승공통일》에 기대를 걸수 없게 된 사정과도 관련되였다.

미제는 조선전쟁기간에 쏟아부은 군사비를 제외하고도 1960년대 말까지 115억 9, 200만US$를 투자하여 괴뢰들의 《힘》을 키워 《북진통일》, 《승공통일》에 내몰려고하였으나 그것이 실현불가능한것임을 인정하지 않을수 없게 되였다. 이것은 1971년 미국회청문회에서 당시 미국방장관이였던 레어드가 《한국군의 지금의 전력은 힘의 통일보다도 북의 침습을 격퇴할 정도에도 이르지 못하였다.》고 개탄한 사실을 놓고도 잘 알수 있다.

이러한 형편에서 미제는 북과 남사이의 《공존》을 유지하고 분렬상태를 고착시켜 괴뢰들에게 《승공통일》을 위한 《실력배양》에 필요한 시간적공간을 지어주는것이 필요하다고 인정하고 당면하게는 전략적으로 《두개 조선》을 조작하는 정책에로 넘어가게 되였던것이다.

총적으로 미제의 《두개 조선》정책은 우리 나라에서 참패의 일로를 걷고있는 패망상과 그로부터 벗어나보려는 발악상의 표현이였다.

- 미국의 《두개 조선》정책은 《닉슨주의》의 산물로서 1960년대 말~1970년대 초이후 미제의 기본적인 대조선정책으로 출현하였다.

○ 이 시기 미제는 새로운 세계제패전략으로서 《닉슨주의》를 내놓았다.

《닉슨주의》란 표면상으로는 《평화적공존》을 표방하면서 그 막뒤에서 침략을 추구하는 정책으로서 큰 나라들과의 《평화적공존》, 작고 분렬된 나라들의 고착과 현상유지를 기본내용으로 하고있다. 닉슨은 1969년 7월 25일 《괌도선언》과 1970년대 초 미국회에 보낸 교서들에서 이것을 미국의 기본전략적정책으로 선포하였다.

닉슨이 내놓은 《괌도선언》은 첫째로, 《아시아인에 의한 아시아》라는 간판밑에 저들의 괴뢰들과 추종국가들이 스스로 《자국방위》와 《아시아의 안보》를 담당하는 《책임》을 맡아야 한다는것이며 둘째로, 아시아에서 미국이 이미 한 《공약》에 대하여 《책임》을 지며 핵전쟁에는 전면적으로 개입한다는것 등이였다.

이것은 다시말하여 미제가 이때까지 저들이 도맡아하던 이른바 《아시아의 방위》와 《안전》, 《개발》에 대한 책임을 《아시아사람들에게 맡기》며 미국은 그것을 《도와준다》는 허울좋은 간판밑에 저들의 괴뢰들과 추종국가들을 《원조》하고 《지도》하여 그들로 하여금 아시아에서 사회주의나라들과 진보적혁명력량을 반대하여 싸우게 한다는것이였다.

○ 미제의 《두개 조선》정책은 《닉슨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새로운 대조선정책으로 작성되였다.

- 미제의 《두개 조선》정책은 본질에 있어서 철두철미 침략적이며 반통일적인 정책이였다.

《두개 조선》정책은 미제가 세계제패를 위한 전략적재편성을 완성하고 남조선괴뢰들의 《실력배양》을 통하여 《북진통일》, 《승공통일》을 실천에 옮길수 있게 될 때까지 조선의 분렬상태를 《고착》시키고 현상유지하는것을 기본내용으로 하고있다. 이것은 이 정책이 우리 나라의 통일을 가로막으며 우리 공화국을 무력으로 침략하려는 침략적이며 반통일적인 정책이라는것을 보여주고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하여 미제는

○ 남조선에서 군사파쑈통치를 계속 유지강화하며 《두개 조선》의 존재를 인정시키기 위하여 교활하게 책동하였으며

○ 다른 한편으로는 새 전쟁도발책동을 집요하게 벌렸다.

 

미제의 식민지군사파쑈통치유지강화책동

- 미제는 박정희괴뢰도당을 부추겨 《유신》독재체제를 조작하고 파쑈적폭압을 강화하였다.

○ 미제는 1972년 말 박정희괴뢰도당으로 하여금 《10월유신》을 조작하고 《유신》독재체제를 수립하도록 하였다.

• 박정희역도는 《10월유신》을 통하여 《유신헌법》을 조작하였다.

• 박정희역도는 《유신헌법》에 기초하여 1972년 12월 23일 사실상 자기를 종신《대통령》으로 하는 《유신》독재체제를 꾸며냈으며 25일에는 《제4공화국》을 조작하였다.

○ 미제는 박정희괴뢰역도를 부추겨 파쑈적폭압을 전례없이 강화하도록 하였다.

• 박정희괴뢰역도는 1972년 10월 23일부터 1973년 3월 3일까지의 기간에 무려 271건의 악법을 새로 조작하거나 개악하였다.

• 박정희역도는 《중앙정보부》를 더욱 강화한것을 비롯하여 파쑈폭압기구를 대대적으로 늘이였다.

남조선괴뢰《중앙정보부》는 괴뢰대통령에게만 직속되여 학교나 종교계, 야당은 물론 괴뢰정부기관, 괴뢰군, 각종 어용단체, 공화당안에까지 정보망을 펴놓고 동향을 감시하고 사소한 반미, 반《정부》요소에 대해서도 가차없이 탄압하였다.

• 미제와 남조선괴뢰들은 남조선혁명가들과 인민들에 대한 탄압을 전례없이 강화하였다.

미제와 남조선괴뢰들은 남조선을 항시적인 《비상사태》에 두고 통치위기가 심화될 때마다 《울릉도거점간첩단사건》, 《인민혁명당사건》(1974), 《학원침투간첩단사건》(1975), 《삼척지역간첩단사건》(1979) 등 각종 《사건》들을 날조하여 자주, 민주, 통일에 대한 인민대중의 지향을 억누르고 혁명가와 애국자, 민주인사들은 물론 집권층안의 반대파들까지 가차없이 체포, 투옥, 학살하였다.

미제의 부추김을 받은 박정희의 《유신》독재체제하에서 남조선은 하나의 살기어린 감옥으로, 파쑈의 광란지대로 전변되였다.

- 미제는 군사파쑈독재를 유지하기 위하여 교활하게 책동하였다.

○ 미제는 전두환군사파쑈정권을 조작하였다.

1970년대 말에 이르러 남조선인민들속에서 《유신》독재를 반대하는 투쟁이 급격히 앙양되자 《유신체제》의 원흉 박정희를 계획적으로 사살하고 《유신》잔당인 군사파쑈분자 전두환에게 《정권》을 넘겨주는 방법으로 식민지통치를 유지하려고 교활하게 책동하였다.

• 미제는 윁남전쟁에서 친미사대매국노로서의 전두환의 《가치》를 검토한 후 다음기 집권세력의 중심인물로 내세웠다.

전두환역도는 윁남전쟁에서 괴뢰군 백마부대 제9사단 29련대장으로 있으면서 살인마로서의 악명을 떨치였다. 미제는 윁남전쟁에서 돌아온 전두환을 1976년 6월에 괴뢰《대통령경호실차장보》로 끌어올려 권력의 중추에 박아놓았으며 점차 그 주위에 괴뢰륙군사관학교 동기생들과 괴뢰륙군사관학교 17기생세력들까지 집결시켜 그들을 군참모부와 서울시 주변부대들의 요직에 배치하였다.

• 미제는 남조선에서 식민지통치위기가 전례없이 심화된 1978년 이후 박정희대신 전두환을 괴뢰정권의 우두머리로 내세우기 위한 준비를 본격적으로 추진시켰다.

미제는 이 시기 전두환과 인맥관계가 깊은자들로 현지지배기구의 우두머리들을 교체하였다. 남조선주재 미국《대사》로는 글레이스틴을, 남조선강점 미제침략군사령관으로는 윅캄을 들여앉히였다. 그리고 1979년 3월에는 전두환을 괴뢰군보안사령관자리에 올려앉히였다.

• 이러한 준비에 기초하여 미제는 1979년 10월 박정희사살사건을 조작하여 《유신》독재자를 제거하고 전두환군사파쑈독재를 조작하였다. 

○ 미제는 1980년대 후반기에는 로태우군사파쑈정권을 조작하였다.

• 미제는 교활한 방법으로 민주세력을 분렬시키고 로태우역도를 우두머리로 하는 《제6공화국》을 조작하였다.

미제는 군사파쑈통치가 남조선인민들의 강력한 반대배격을 받는 조건에서 야당과 민주세력을 분렬와해시켜 로태우역도의 당선을 조작하려고 획책하였다. 미제는 금전공세와 《합의개헌》책동을 통하여 야당과 민주세력의 후보단일화를 파탄시켜 민주력량을 분렬시키는것과 함께 선거모략의 능수들을 현지지배인물로 파견하여 로태우의 당선을 조작하도록 하였다. 1987년 12월 16일에 진행된 괴뢰대통령선거에서 로태우역도가 온갖 사기와 협잡의 방법으로 36%의 《지지표》를 받아 대통령으로 당선됨으로써 남조선에서 《제6공화국》이라고 불리우는 군사파쑈정권이 또다시 출현하게 되였다.

• 로태우정권조작후 미제는 《여야타협》에 의한 《6공》의 《대보수련합》을 실현함으로써 식민지군사파쑈독재체제를 유지하기 위하여 악랄하게 책동하였다.

미제에 의하여 전두환군사파쑈체제를 그대로 상속받은 《6공》은 조작되였으나 1988년 4월에 있은 괴뢰《국회》의원선거에서 《민정당》이 총 299석중 겨우 127석을 차지함으로써 《여소야대》의 세력구도가 형성되였다. 이에 당황한 미제는 로태우(《민정당》), 김영삼(《민주당》), 김종필(《민주공화당》)역도들의 《대보수련합》을 실현하도록 조종함으로써 1990년 2월 9일 3당이 야합된 《민자당》을 조작하였다. 그리하여 《민자당》은 《국회의석》 215석을 차지한 《거대여당》으로 되였다.

- 미제는 남조선인민들의 광주인민항쟁을 야수적으로 교살하였다.

 

            항쟁에 궐기하는 광주시민들     자동차를 타고 거리로 행진한는 항쟁참가자들

 

○ 미제는 광주인민항쟁교살의 배후조종자이며 원흉이다.

그 근거는

첫째로, 미제가 저들의 작전지휘권안에 있던 괴뢰9사, 20사, 31사를 비롯한 방대한 괴뢰군무력을 전두환역도로 하여금 광주인민항쟁을 야수적으로 진압하도록 넘겨준것이며

둘째로, 미공군과 해군을 동원하여 광주대학살을 정치군사적으로 뒤받침해준것이며

셋째로, 검문소들에 괴뢰군과 함께 미군을 배치하여 시민학살에 직접 참가한것이며

넷째로, 학생시민측의 중재요청을 거부하여 괴뢰들을 시민대학살에로 내몬것이며

다섯째로, 광주학살후 이를 찬양, 고무한것이다.

○ 미제의 부추김을 받은 전두환군사파쑈악당은 전대미문의 광주대학살만행을 야수적으로 감행하였다.

1980년 5월 광주인민항쟁에 대한 류혈적인 교살만행은 미제와 남조선군사파쑈들이야말로 자주, 민주, 통일을 위한 남조선인민들의 투쟁을 가로막아나선 극악한 살인마, 철천지원쑤라는것을 온 세계앞에 똑똑히 보여주고있다.

 

미제의 《두개 조선》조작책동

《두개 조선》정책을 실현하기 위한 미제의 책동은 크게 《대화전술》에 기초한 《두개 조선》조작책동과 《두개 조선》을 국제적으로 《공인화》시키기 위한 책동으로 갈라볼수 있다.

- 미제는 북남사이의 《대화》를 통한 《두개 조선》조작책동에 매달렸다.

○ 미제는 1969년부터 북남《대화》와 《협상》의 구호를 들고나와 우리 나라의 평화통일에 관심이나 있는듯이 가장하면서 분렬된 현상태를 유지하려고 음흉하게 책동하였다.

• 미제가 《대화》와 《협상》의 구호를 들고나오면서 노린 목적은 우선 평화통일을 지향하는 남조선인민들의 환심을 얻어 식민지통치의 위기를 완화시키며 또한 지연전술을 써서 《협상》을 무한정 끄는 방법으로 분렬된 현상태를 유지하면서 그 시간을 새 전쟁준비에 리용하며 다음으로 이러한 《계획》이 뜻대로 되지 않는 경우에는 《대화》를 고의적으로 결렬시키고 그 책임을 우리 공화국에 전가시키는것과 함께 《협상불가능론》을 들고나와 국제적으로 《두개 조선》조작을 합법화해보려는데 있었다.

• 이러한 목적으로부터 미제는 북남대화가 시작되자 그것을 분렬대화로 전환시키기 위하여 남조선괴뢰들을 막후조종하였다.

미제는 북남대화를 분렬을 위한 대화로 되도록 하기 위한 이른바 《대화전술》이라는것을 괴뢰들에게 쥐여주었다.

그 내용은

첫째로, 대화가 광범한 각계각층을 망라하는 폭넓은 대화로 되지 못하게 남조선《당국》이 독점하고 그 범위를 벗어나지 않도록 하며

둘째로, 우리와의 대화에서 《알맹이 없는》 공리공담만을 되풀이하면서 시간을 무한정 끌도록 하며

셋째로, 우리와 마주 앉아 대화는 하되 합의는 보지 말며 부득이 일련의 문제에 대해 합의를 보게 되는 경우에는 그것을 리행하지 말라는것이였다.

• 미제는 저들의 《대화전술》이 폭로되자 본심을 로골적으로 드러내놓고 조선의 영구분렬과 《두개 조선》조작을 공공연히 주장해나섰다.

미제는 남조선당국자로 하여금 1973년 6월 23일에 이른바 《평화통일외교정책에 관한 특별성명》이라는것을 통하여 《두개 조선》조작음모를 공식적인 《정책》으로 선포하게 하였다.

○ 미제는 1980년대에 이르러 이른바 《남북직접협상론》을 들고나와 동서도이췰란드방식에 의한 《두개 조선》조작을 실현해보려고 교활하게 책동하였다.

미제가 들고나온 《남북직접협상론》은 북과 남이 마주앉아 동서도이췰란드처럼 서로 상대방을 승인하는 문건에 도장을 찍게 하자는것이였다. 여기에는 북과 남이 《대화》를 통하여 서로 상대방을 《주권국가》로 승인하게 함으로써 《두개 조선》을 국제적으로 《공인화》하려는 미제의 흉계가 깔려있었다.

결국 미제의 교활하고 악랄한 책동에 의하여 우리의 공명정대한 통일방안과 성의있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북남대화는 파탄되게 되였다.

- 미제는 《두개 조선》을 국제적으로 《합법화》, 《공인화》시키기 위하여 교활하게 책동하였다.

○ 미제는 1970년대에 《두개 조선》을 국제적으로 《합법화》하기 위하여 여러가지로 교활하게 책동하였다.

• 미제는 1970년대 초 유엔무대를 통하여 《두개 조선》을 국제적으로 《합법화》하기 위하여 온갖 책동을 다하였다.

미제는 1973년과 1975년에 유엔총회 제28차, 제30차 회의들에서 남북조선을 유엔에 가입시키는 방법으로 《두개 조선》을 합법화해보려고 책동하였으나 《유엔동시가입안》이나 《유엔단독가입안》은 의제로도 상정되지 못한채 기각되고말았다.

그러자 미제는 《교차승인》문제를 들고나와 그것을 어떻게 하나 성사시켜보려고 갖은 책동을 다하였다.

미제가 《교차승인》에서 추구한것은 일본과 미국이 우리 공화국을 승인하고 외교관계를 맺는 동시에 중국과 이전 쏘련이 남조선을 승인하고 외교관계를 맺게 함으로써 《두개 조선》을 국제적으로 인정시켜보려는것이였다.

그러나 이러한 《교차승인》놀음도 실패를 면할수 없었다.

• 미제는 유엔에서의 《두개 조선》조작책동이 실패하자 1970년대 후반기부터는 유엔무대밖에서 《4자회담》이요, 《3단계 4자회담》이요 하면서 《두개 조선》을 국제적으로 인정시켜보려고 악랄하게 책동하였다.

《4자회담》이란 우리 공화국과 남조선괴뢰, 그리고 중국과 미국이 모여앉아 조선정전협정의 《유효성》을 담보하며 나아가서 조선에서 《항구적인 평화》를 보장하기 위한 방도를 토의한다는것이였다. 《3단계 4자회담》이란 제1단계에서는 빠른 시일안에 북과 남사이에 회담장소, 회담참가범위 등을 《협의》하고 중국과 미국이 옵써버로 참가한 가운데 북과 남이 회담을 가지며 제2단계에서는 북남회담이 진척되는 경우 중국과 미국이 정식성원으로 참가하여 《4자회담》을 진행하며 제3단계에서는 쏘련(당시)과 일본의 참가밑에 확대회의를 열고 《정전협정》을 유지하기 위한 문제를 토의한다는것이였다.

여기에서 미제는 주권국가도, 정전협정의 당사자도 아닌 남조선괴뢰들을 《4자회담》에 끌어들임으로써 괴뢰정부에 국제적으로 주권국가의 지위를 보장해주고 나아가서《두개 조선》을 조작하려고 꾀하였던것이다.

○ 미제는 1980년대에 들어와 《두개 조선》을 국제적으로 《공인화》하기 위한 책동에 더욱 집요하게 매달렸다.

• 미제는 1983년에 중국이 남조선을 승인하고 일본이 우리 공화국을 승인하며 그후에 미국과 이전 쏘련이 우리 공화국과 남조선을 인정한다는 《단계별교차승인론》이라는것을 들고나왔다.

미제는 괴뢰들로 하여금 1983년 6월부터 《북방정책》에 매여달리게 하였으며 괴뢰들의 몸값을 올려주기 위하여 제24차올림픽을 주최하도록 막후공작을 벌렸다. 《북방정책》은 중국, 이전 쏘련 등 사회주의나라들의 《문호를 개방》하고 체육, 문화, 경제교류단계를 거쳐 《국교수립》에까지 나감으로써 《사회주의장벽》을 허물고 《두개 조선》조작의 돌파구를 열어보려는 반통일정책이였다.

• 미제는 1980년대말에 이르러 《유엔동시가입》을 실현시킬수 없는 조건에서 남조선의 《단독가입》을 실현시키려고 집요하게 책동하였다.

미제는 남조선괴뢰들로 하여금 1989년 제44차 유엔총회를 계기로 《유엔동시가입》정책을 《유엔단독가입》정책으로 바꾸고 1991년 4월 9일에는 정식 《유엔단독가입》신청서를 유엔안보리사회에 제기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기어이 남조선의 《유엔단독가입》을 실현시키고 유엔무대를 《두개 조선》조작에 리용하려고 책동하였다.

이리하여 우리 나라의 통일도상에는 새로운 난관이 조성되였다. 그것은 만약 남조선이 단독으로 유엔에 가입하게 되면 우리 나라와 관련한 문제들이 유엔무대에서 남조선괴뢰들만이 참가한 가운데 일방적으로 론의되게 될것이기때문이였다.

이러한 조건에서 위대한 수령님들께서는 조성된 난관을 극복하고 조국통일문제해결에 유리한 국제적환경을 조성하기 위하여 우리 공화국이 유엔에 주동적으로 가입하도록 하는 전환적조치를 취하시였다.

1991년 9월 우리 공화국이 유엔에 주동적으로 가입함으로써 유엔무대를 우리 나라의 분렬을 고정화하는데 악용하려던 미제와 남조선괴뢰들의 음모는 실현될수 없게 되였다.

이처럼 미제는 1970년대에 이어 1980년대에 들어와서도 우리 나라를 영원히 둘로 갈라놓기 위하여 파렴치하고 집요하게 책동하였으나 그것은 전면적으로 파탄되고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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