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우리 공화국에 대한 일본군국주의자들의 적대시책동의 강화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요시다로부터 기시, 이께다를 거쳐 사또에 이르기까지 내각은 여러번 바뀌였지만 우리 나라에 대한 일본정부의 적대시정책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습니다.》

일본군국주의자들은 패망후 우리 공화국과의 모든 거래를 차단하고 시종일관하게 적대시정책을 실시하여왔다.

- 일본군국주의자들은 전후 우리 공화국을 첫 공격대상으로 선정하고 미제가 도발하는 새로운 조선침략전쟁에 끼여들려고 온갖 책동을 다하였다.

○ 일본반동들은 우리 공화국을 반대하는 새 전쟁도발야망을 공공연히 드러내놓았다.

1961년 2월 당시 일본반동정부의 외무상이였던 고사까 겐따로는 《남조선주권이 북반부에까지 미치지 못하고있는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라고 떠벌이였으며 사또는 1969년 1월 12일 미국대통령 닉슨과의 회담에서 남조선과 일본은 《운명공동체의 관계》, 《순치의 관계》라고 하면서 북에 의한 《남침위협》에 대하여 떠들어댔다.

○ 일본반동들은 미제와의 공모밑에 우리 나라를 침략하기 위한 구체적인 작전계획을 짜놓았다.

일본반동들은 1963년 6월에 《세계화살작전계획》을 작성하고 《자위대》를 《제2차 조선전쟁》에 밀어넣어 미제침략군, 남조선괴뢰군과 함께 협동작전에 참가하게 하며 전쟁범위를 점차 확대할데 대하여 흉계하였고 그후 1964년에는 그것을 더 구체화하여 《날아가는 룡작전》계획을 조작하였다.

일본군국주의자들은 이러한 침략계획을 더욱 구체화하여 1966년 9월에는 《달리는 황소작전》계획을 새로 꾸며냈다.

여기에서는 조선전쟁에 필요한 물자를 전적으로 일본이 담당하며 《자위대》가 조선침략을 위한 작전에서 주역을 놀되 그 최고통수권은 미제가 장악할것을 예견하였다.

- 일본군국주의자들은 우리 공화국을 《가상적적국》으로 규정하고 조일간에 인사래왕과 경제교류도 하지 못하도록 엄격히 통제하였다.

○ 일본반동들은 공화국공민의 일본입국을 거부하고 일본인의 공화국방문도 엄격히 통제하였다.

일본반동정부는 1960년대까지 일본에서 진행되는 국제체육행사에 참가하는 선수단과 대표단을 제외하고는 공화국공민의 일본입국을 허용하지 않았으며 일본인들의 일반려권에도 《북조선은 제외한다.》고 표기함으로써 반공화국적대시정책을 로골적으로 드러내놓았다.

○ 경제분야에서도 일본반동들은 1960년대 중엽까지 우리 공화국과의 바다를 통한 무역을 금지하고 현금직접결재를 허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1960년대 후반기에도 관세차별, 수출입품목제한, 수출입은행자금융자의 금지 등 차별조치들을 취하여 경제교류를 억제하였다.

이 모든 사실은 일본군국주의자들이 우리 공화국에 대하여 얼마나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고있었는가 하는것을 보여준다.

- 우리 공화국에 대한 일본반동정부의 비우호적정책은 공화국의 해외공민들인 재일조선동포들의 법적권리를 인정하지 않고 그들을 박해한데서도 표현되였다.

○ 일본반동정부는 재일조선공민들에게 일자리를 마련해주기는 고사하고 그들의 재산을 함부로 침해하거나 집단적폭행을 가하는 행위까지 감행하였다.

재일동포들에 대한 일본반동정부의 차별조치로 1958년 현재 일할수 있는 전체 재일동포들가운데서 직업을 얻지 못한 실업자는 80%에 달하였으며 1947~1961년사이에 《외국인등록법》에 《위반》된다는 구실로 재일조선동포들을 체포구금한 건수는 무려 18만 1 900건에 달하였다.

○ 일본반동들은 재일조선공민들의 민주주의적민족교육의 권리를 박탈하고 수많은 조선인학교들을 페쇄하였으며 조선인교원들을 함부로 체포하는 비법행위도 서슴없이 감행하였다.

또한 재일조선공민들에게 남조선《국적》을 강요하려고 악랄하게 책동하면서 이를 거절하는 조선사람들을 강제로 추방하기까지 하였다.

○ 일본반동들은 재일조선공민들의 귀국의 권리를 란폭하게 침해하는 책동도 감행하였다.

일본반동들은 재일조선공민들의 귀국문제가 제기되자 남조선괴뢰들과의 《<회담>에 의하여 정치적으로 해결되여야 한다.》고 떠벌이면서 그것을 저들의 부당한 정치적목적에 리용하려고 꾀하였다.

그러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당한 요구와 재일조선공민들의 귀국실현을 위한 대중투쟁이 강화되자 일본반동정부는 1959년 2월 이에 응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리하여 조일량국적십자회간의 합의에 의하여 1959년 4월 13일부터 제네바에서 재일조선공민들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로의 귀국과 관련된 쌍무회담이 개시되였다. 일본측은 이 회담에서 《의사확인》이니, 《불평처리》니 하는 부당한 구실을 붙여 재일조선공민들의 귀국사업에 장애를 조성하려고 책동하였다. 그리고 우리측의 일관한 성의있는 노력과 합리적인 방안에 의하여 1959년 6월 해당 문제에 대한 최종합의가 이루어진 다음에도 국제적십자회의 《승인》이 있은 후에 조인하겠다고 하면서 조인을 하지 않으려고 획책하였다. 심지어 국내외여론의 맹렬한 비난에 봉착하여 궁지에 빠진 일본측이 1959년 8월 귀국협정에 조인하고도 미제의 사촉을 받은 기시반동도당은 《자유원칙》이니, 《선별》이니 하면서 이를 극력 방해하여나섰다.

그러나 일본반동정부는 그 어떤 방해책동으로써도 재일조선공민들의 성스러운 귀국의 길을 가로막을수 없었다. 1959년 12월부터 재일조선공민들은 영광스러운 조국-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로 귀국하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온갖 방해책동을 감행하여온 미제와 일본반동들, 남조선괴뢰들에 대한 일대 정치적타격으로 되였다.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속에 제1차 귀국선이 떠나는 일본 니이가다항

 

이와 같이 일본군국주의자들은 1960년대 말까지 남조선괴뢰들과 결탁하여 우리 공화국을 반대하는것을 대조선정책으로 내세우고 침략전쟁도발책동을 끊임없이 벌리였으며 조일간의 교류를 억제하고 재일조선공민들을 탄압하는 등 온갖 적대적책동을 집요하게 감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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