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인을 놀래운 자주독립의 함성-세기를 넘어 되새겨본다​

 

오늘 우리 겨레는 3.1인민봉기 100돐을 맞이한다.

우리 나라를 강점하고 겨레에게 식민지노예의 운명을 강요한 일제에게 항거하여 2천만 백의동포가 독립만세의 함성을 터치였던 력사의 그날로부터 꼭 한세기가 된다.

 

터졌고나 터졌고나 조선독립의 함성

10년을 참고 참아 이제 터졌네

3천리 금수강산 2천만 민족

살았고나 살았고나 아 한소리에

만세 만세 독립 만만세

만만세 조선독립 만만세

 

지금도 귀를 기울이면 100년전 삼천리방방곡곡에서 울려퍼지던 《독립운동가》의 우렁찬 노래소리가 들리여오는것만 같다.

참으로 3.1인민봉기는 식민지노예로 짓밟혀 살기를 결단코 원치 않는 우리 민족의 강의한 정신과 죽으면 죽을지언정 굽히지 않는 불굴의 기개를 시위한 력사적인 대거로 민족사에 깊이 새겨져있다.

3.1인민봉기는 단순히 우리 민족사의 갈피에만 새겨져있는 투쟁이 아니였다.

당시 사멸해가는 민족으로 동정의 눈길만을 받아오던 우리 겨레가 보여준 거세찬 항거의 모습은 식민지, 반식민지나라인민들 아니 전세계인민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깊은 여운을 남기였다.

 

결단코 노예로는 살수 없다

 

당시 세인의 눈에 비낀 우리 민족은 가장 야수적이고 횡포무도한 일제의 총칼앞에서 소리없이 시들어가던 약소민족이였다.

제국주의가 식민지분할에 혈안이 되여 날뛰던 19세기 말 20세기초 일제는 우리 나라를 저들의 식민지로 만들려고 로씨야와도 싸웠고 청나라와도 싸웠다. 마침내 우리 나라를 강점한 일제는 마치도 저들이 치룬 《희생》을 봉창이라도 하려는듯 중세기적인 억압과 강탈에 매여달리였다.

일제의 강도적인 수탈과 억압의 절대적인 수단은 무자비한 폭제였다. 《조선사람은 일본법에 복종하든가 아니면 죽어야 한다.》는것이 우리 겨레에게 가해진 폭제의 구호였다. 항변한마디에 목이 잘리우고 심지어 조선말한마디에도 매채가 가해졌다. 비녀로부터 고무신에 이르기까지 깡그리 벗기웠고 희디흰 백의와 조선저고리는 기모노와 하오리로 바뀌여갔다. 우리 민족의 산과 벌, 강들도 일제의 총칼밑에 벗기우고 헐리우며 신음했다.

 

당시 우리 나라에 대한 일제의 략탈이 얼마나 가혹했는가는 레닌의 저서에 지적된 내용을 통해서도 짐작할수 있다.

레닌은 저서에 《일제는 … 모든 새로운 발명들과 순전한 아시아식고문을 결합시킨 전대미문의 야수성으로 조선을 략탈하고있으며 그를 계속 략탈하기 위하여 싸울것이다.》라고 썼다.

 

한일합병후 10년간 일제는 야만적인 강탈과 억압으로 조선을 하나의 거대한 감옥으로 만들어버리였다. 일제의 중세기적공포정치의 총검밑에서 우리 민족은 언론, 집회, 결사, 시위의 자유를 비롯한 모든 사회적권리와 재부를 강탈당하고 끝없는 고통속에서 신음하였다.

이러한 수난의 시대, 암흑의 시대, 기아의 시대를 더이상 그대로 감수할수 없어 온 겨레가 분연히 궐기해나섰던것이다.

1919년 3월 1일 평양에서는 낮 12시에 종소리를 신호로 수천명의 청년학생들과 시민들이 장대재에 있는 숭덕녀학교 운동장에 모여들어 《독립선언서》를 랑독하고 조선이 독립국가라는것을 엄숙히 선포한 다음 《조선독립 만세!》, 《일본인과 일본군대는 물러가라!》는 구호를 웨치면서 격렬한 가두시위를 벌리였다.

그때당시 민족적량심을 가진 조선사람들은 직업과 신앙, 남녀로소의 구별이 없이 누구나 다 이 봉기에 참가하였다.

 

그들가운데는 열살도 못된 아이들이 있는가 하면 여든을 넘긴 로인도 있었고 봉건도덕에 억눌려 문밖출입조차 삼가하던 려염집아낙네들과 천민중 천민이라는 대접을 받던 기생들도 있었다. 그리고 종교인들과 상인들, 지게군, 노비, 심지어는 거리를 방황하던 걸인들도 있었다.

 

봉기는 전국의 13개 도를 휩쓸었고 중국 동북지방과 상해, 로씨야의 연해주, 일본, 하와이 등 해외에 있는 조선동포들에게까지 파급되여 전민족적인 항쟁으로 번져갔다.

이처럼 각이한 사람들이 수천, 수십만도 아니고 전민족적으로 항거해나서게 된것은 절대로 노예로 짓밟혀 살기를 원치 않는 우리 민족의 강의한 자주정신에 있었다.

 

죽으면 죽을지언정 굴할수 없다

 

3.1인민봉기가 일어나자 일제는 시작부터 살인《제령》들을 공포하면서 우리 민족을 야수적으로 학살하였다.

당시 조선총독이였던 하세가와는 1919년 4월 중순에 《제령 7호》(정치에 관한 범죄처벌에 관한 건)라는 식민지악법을 조작공포하여 조선인민을 마구 학살할수 있는 《법적》근거를 만들어놓았다.

간또대지진때 저들의 땅에서 우리 민족을 보이는족족 학살하던 그 야수성이 3.1인민봉기때에 와서 우리 겨레의 땅에서 그대로 재현되였다.

3.1인민봉기당시 일제가 우리 민족을 얼마나 야수적으로 학살했는가는 아래의 자료들을 놓고서도 알수 있다.

 

1919년 4월 중순 일제의 조선강점군 제20사단 79련대소속 보병중위 아리다는 10여명의 졸개들을 거느리고 당시 경기도 수원군 향남면 제암리에 기여들어 인민들을 교회당에 몰아넣고 미친듯이 총탄을 퍼부었다. 이때 한 녀성이 아이를 창문으로 내밀면서 《나는 죽어도 좋으니 이 아이만은 살려달라.》고 애타게 웨쳤으나 일제는 그 아이를 총창으로 찔러 교회당안에 집어던지고 교회당과 그 주변의 집들을 마구 불살라버렸다. 일제의 이와 같은 잔인무도한 만행으로 이날 제암리에서는 300여명의 주민들이 집단적으로 학살당하였다.

당시 일제는 이러한 야수적방법으로 경기도 수원군에서만도 317호의 집을 불태워버렸으며 1 000여명의 무고한 주민들을 무참히 학살하였다.

 

일제의 이와 같은 학살만행에 의하여 삼천리금수강산은 우리 민족의 선혈로 붉게 물들여졌다.

1919년 3월 1일부터 5월말까지 3개월동안에 국내에서 학살된 애국적인민들의 수가 7 509명, 부상자가 1만 5 961명, 체포투옥된 사람의 수가 4만 6 681명이였는데 부상자의 대부분은 그후 얼마 못 가서 죽었고 피검자의 적지 않은 사람들도 뒤에 학살되였다고 한다.

그러나 총칼로는 항거의 불길을 끌수 없었고 투쟁대오앞에 뿌려지는 인민들의 선혈은 오히려 우리 겨레의 기개를 더욱더 백배해주었다.

 

세인은 이러한 민족의 기개를 일제의 군도에 왼팔, 오른팔을 차례로 잘리우면서도 독립만세를 웨치는 나어린 소녀의 함성에서도 느끼였고 총탄에 맞고 칼에 찔려 숨지면서도 자기의 피와 뼈라도 불꽃이 되고 총탄이 되여 일제를 쳐부시리라고 웨친 어린 소년의 피의 절규에서도 느끼였다.

《물이 병에 차있으면 움쩍만 하여도 물이 넘는다. 마찬가지로 만세가 내 가슴속에 꽉 차있으니 조금 움직여도 만세소리가 저절로 나오는것이 물과 비슷하다. 나로 하여금 만세부르는것을 멈추게 하려면 나의 몸을 안정시켜라.》 이것은 보통학교의 한 학생이 심문을 받을 때조차 쉬지 않고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는 까닭을 몰라하는 놈들에게 던진 폭탄같은 웨침이였다.

류관순은 이팔청춘의 부푸는 삶을 일제와의 투쟁에 바친 우리 민족의 장한 딸이였다.

일제는 그 어떤 악형으로도 이 나어린 소녀에게서 독립의 넋을 빼앗지 못하자 7년형이라는 무거운 형기를 들씌우고도 모자라 야수적인 방법으로 그를 학살하였다.

당시 경기도 양평군에 사는 여든살나는 한 로인은 서울 대한문앞에서부터 남녀학생들의 시위대렬에 참가하여 《조선독립만세》를 웨치다가 종로경찰서에 체포되여 심문을 받았는데 로인을 심문하던 경찰이 《너는 로망한 자이니 석방한다》고 하자 크게 노하며 《로망이 아니라 진심이며 무고한 청년과 어린이들이 무서운 형벌을 받고있는것을 보고 어찌 차마 혼자서 돌아갈수 있겠는가. 저 남녀학생들도 같이 석방하여주면 나도 집에 돌아가겠지만 그렇지 못할 때는 이곳에서 나도 죽는것이 옳다.》라고 말하여 일본교형리들을 놀래웠다.

 

이처럼 봉기군중은 일제의 야만적탄압에도 투쟁을 멈추지 않았으며 대중적인 독립만세시위투쟁으로부터 전민족적인 반일항쟁으로 넘어가 일제의 통치기관들을 습격파괴하고 침략자들과 매국노들을 무자비하게 징벌하였다.

이렇게 되자 일제는 우리 겨레의 자주독립의지에 대한 세계의 지지와 여론을 두려워하던 나머지 3월 11일에 일본반동정부의 내각총리대신 하라는 당시 조선총독이였던 하세가와에게 3.1인민봉기를 대단치 않은 사건처럼 묘사하여 세계여론을 기만할데 대한 비밀지령을 내려보냈다고 한다.

그러나 그 무엇으로써도 우리 민족의 강의한 자주정신과 불굴의 기개를 꺾을수도 가리울수도 없었다.

자주독립의 거세찬 함성과 노도와 같은 투쟁기세는 세인의 이목을 틀어잡았고 산과 강, 국경을 넘어 퍼져나갔다.

서울에서는 봉기가 일어나자 종로거리로 진출한 수천수만의 시위군중이 3개의 대오로 나누어 거리를 누비며 전진하였는데 한 시위대렬은 부청앞과 남대문을 거쳐 외국령사관들이 있는곳으로 진출하여 나라의 독립을 이룩하려는 조선민족의 꺾을수 없는 지향을 세인의 눈앞에서 시위하였다.

 

하기에 당시 외국의 한 기자는 3.1인민봉기를 직접 목격하면서 조선사람에게는 《그들만이 가지고있는 어떤 단호한 정신력이 있었다. 일본인들은 조선인을 동화한것이 아니라 동화될것》이라고 하였다.

 

식민지, 반식민지나라들에서도 3.1인민봉기에서 발휘된 우리 겨레의 자주정신과 기개에 놀라움을 금치 못해하였다.

 

당시 중국의 한 신문은 《조선인민의 민족해방운동이 힘차게 전개되고있는데 우리 중국사람들은 무엇을 하고있는가? 조선사람과 같이 로동자, 농민, 청년학생, 지식인, 상인, 기업가들도 들고일어나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피력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당시 감옥에서 3.1인민봉기에 대한 격동적인 소식을 전해들은 인디아의 한 정치활동가는 자기 딸에게 보낸 편지에서 《1919년의 3.1인민봉기때 조선인민 특히 청년남녀들은 우세한 적에 대항하여 용감하게 투쟁하였다. 조선에서는 학교를 갓 나온 젊은 녀성들도 투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는것을 들을 때 너의 마음에 크게 끌릴것》이라고 쓰면서 마땅히 조선의 청년학생들을 본받아 반제투쟁에 떨쳐나서야 한다는것을 강조하였다.

 

이 모든것은 3.1인민봉기에서 발휘된 우리 민족의 자주정신과 불굴의 기개가 당시 세인에게 얼마나 큰 충격을 주었는가를 잘 알수 있게 한다.

 

한세기전 우리 겨레가 그토록 용감무쌍한 자주정신과 불굴의 기개를 발휘하며 일떠서서 성취하려던 조선독립을 끝내 이룩하지 못한채 력사의 갈피속에 새긴 3.1인민봉기는 오늘도 겨레의 가슴마다에 지울수 없는 피의 교훈을 새겨주고있다.

그것은 민족적독립과 자유를 위한 투쟁에서 승리하자면 반드시 탁월한 수령과 혁명적당의 통일적인 령도밑에 옳은 전략전술을 가지고 투쟁을 조직적으로 벌려나가야 하며 봉기의 《지도자》들 처럼 큰 나라를 바라볼것이 아니라 자체의 력량을 튼튼히 마련해야 한다는것이다.

이것이 바로 3.1독립만세함성이 피로써 새겨주는 교훈이며 진리이다.

재중동포 한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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